저출생이 계속되는 가운데, 역설적이게도 보육현장에서는 발달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모든 부모는 내 아이가 남들보다 우수한 인재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 어릴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더 똑똑한 아이로 키우고자 애를 쓴다. 하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타고난 능력과 기질, 개성과 강점이 모두 다른 고유한 존재다. 이토록 다채로운 빛깔을 지닌 아이들을 하나의 획일화된 틀에 억지로 맞추려하거나 부모의 조급한 기대를 덧씌우는 일은 오히려 아이가 가진 고유한 잠재력이 건강하게 싹뜨는 것을 가로막는다. 특히나 비교와 경쟁의 사회적 분위가가 만연한 대한민국은 발달이 지연되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당당히 키우기에 녹록지 않은 나라다.
■ 놀이를 잃어버린 아이들과 생존경쟁에 내몰린 현장
여기에 겹친 제도적 과도기는 현장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지난 2024년 12월, 영유아 보육·교육 업무가 교육부로 일원화(유보통합)되었으나, 정작 교육청과 지방정부 차원의 실질적인 행정 및 재정 통합은 여전히 요원한 상태다. 이런 어수선한 틈바구니 속에서 원아 수 감소라는 직격탄을 맞은 영유아 보육 교육기관들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 내몰렸다. 유아반 아동이 줄어들면서 그나마 힘겹게 유지되던 장애통합반마저 존폐 위기에 처했고, 어린이집들은 유치원에 아이들을 뺏기지 않기 위해 부모들의 입맛에 맞춘 '특별활동'과 '특성화 활동'을 무한경쟁하듯 늘려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결과 아이들의 하루는 촘촘한 스케줄에 쫓기게 되었고, 영유아기에 가장 필수적인 '주도적 놀이 시간'은 턱없이 줄어들었다. 특히 영어나 수, 문자 학습에 치중하는 분위기는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 영유아들에게 폭력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과제들을 마치 노동처럼 떠안게 되고, 결국 교사가 아이 대신 학습지의 빈칸을 채워 가정으로 보내는 웃지 못할 촌극까지 벌어진다.
장애아동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아이의 개별적인 수준에 맞춰 목표를 설정하고 지원하는 '개별화교육(IEP)'이다. 그러나 지금 현장의 교사들은 미술, 과학, 한글, 수 교재를 든 아이들을 한 명씩 붙잡아 앉혀놓고 그날의 진도 분량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아이의 발달을 위한 진정한 교육의 시간이, 그저 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과물 생산'과 '과제 이행'의 시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 누구를 위한 지원인가, 교사를 옥죄는 기형적 구조 이러한 파행은 기형적인 구조에서 기인한다. 외부 강사가 미리 세팅된 프로그램을 30분 남짓 반 전체 원아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특별활동은 애초에 개별적 목표 설정이 불가능하다. 강사 없이 교재만 구매해 교사가 진행하는 특성화 활동 역시, 과정을 개발한 업체의 이윤 구조에 얽매여 매주 소화해야 할 4회차 분량의 교재들이 과목별로 쏟아진다. 게다가 부모 부담금을 줄이겠다며 특별활동과 특성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최근의 정책 방향은 현장의 파행을 도리어 부추긴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 현장학습을 하고 자연을 만끽하며 외부 경험을 넓혀야 할 아이들이 비용 지원이라는 명목 아래 좁은 교실에 갇혀 매일매일 교재와 씨름하고 있는 꼴이다. 현장을 옥죄는 행정 구조도 문제다. 지역별 보육정책위원회에서 해마다 현장학습비 4만 원, 특성화비 3만 원, 행사비 2만 원... 식으로 세세하게 항목을 쪼개어 상한선을 정해두고, 이를 다시 개인별 사용액으로 세세하게 정산하도록 강제하는 업무는 교사들의 에너지를 심각하게 고갈시킨다. 실제로 특별활동을 유독 많이 하는 일부 사립유치원의 교사들이 정작 아이들과 깊이 있는 놀이를 나누지 못하고 외부 강사의 시간표에 맞춰 아이들을 통제하는 '일정 관리자' 역할로 전락했다는 현장의 자조 섞인 한탄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결국, 점점 줄어드는 아이들을 기관에 데려오기 위해 부모의 불안과 경쟁심을 자극하고 입맛에 맞추는 파행적 영유아 교육 구조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뼈아픈 현실이다. ■ 비장애 아동만 바라보는 탁상행정, 교육부의 중점과제가 놓친 것들 교육부는 올해 유보통합의 중점과제로 '5세 이음교육', '독서교육 강화', '방과후 프로그램 활성화'를 내세웠다. 겉보기에는 교육의 질을 높이는 훌륭한 정책 같지만, 발달장애 아동이 함께 숨 쉬는 통합보육 현장의 관점에서 이는 철저한 배제이자 또 다른 폭력이다. 첫째, 유치원·어린이집과 초등학교의 연계를 돕는다는 '5세 이음교육'은 철저히 생물학적 나이만을 기준으로 삼은 맹점을 지닌다. 발달장애 아동은 실제 나이가 5세라 하더라도 발달 연령은 2~3세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초등학교 교실에 앉아있기 위한 착석 훈련이나 기초 학습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자조 기술을 익히고 타인과 눈을 맞추는 사회성 훈련이다. 발달 단계를 무시한 채 연령군으로 묶어버린 이음교육은 장애 아동에게 매일 뼈아픈 실패감만 안겨줄 뿐이다. 둘째, '독서교육 강화' 역시 인지 중심의 획일적 접근이다. 언어 발달이 지연되거나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 일괄적인 독서 활동을 강요하는 것은 교육적 의미가 없다. 이들에게는 활자를 읽어내는 것보다, 그림 카드로 자신의 요구를 표현하는 보완대체의사소통(AAC)이나 교사와 함께 책의 그림을 보며 상호작용하는 개별화된 접근이 훨씬 절실하다. 셋째, '방과후 프로그램 활성화'는 통합 현장의 현실을 가장 모르는 정책이다. 외부 강사가 주도하는 다인수 위주의 방과후 특성화 프로그램은 전개 속도가 빠르고 시청각적 자극이 강해 발달장애 아동이 참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이들은 의미 없이 교실 주변을 배회하거나 쏟아지는 자극에 힘들어하다 결국 문제행동을 일으키게 된다. 정규 일과만으로도 쉽게 피로해지고 에너지가 고갈되는 장애 아동에게 필요한 것은 쉼표가 있는 휴식이나 1:1 맞춤형 치료 지원이지 결코 쉴 틈 없이 돌아가는 방과후 프로그램이 아니다. 결국 교육부의 핵심 과제들은 모두 '학습할 준비가 된 비장애 아동'만을 상정하고 설계된 반쪽짜리 정책이다. 진정한 유보통합이라면 한 가지 기준을 세워두고 아이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장 느린 아이의 보폭까지 품을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 개별화 교육의 전제 조건, 인건비 보장과 교사 대 아동 비율 축소 지금 정부는 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기타필요경비'와 같은 명목으로 부모에게 쥐어주는 지원을 늘리고 있지만, 이는 파행적 특별활동을 심화시키는 부작용만 낳고 있다. 현장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부모 개별 지원금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보육 기반을 지탱할 본질적인 ‘운영비 지원’과 ‘교사 대 아동 비율 축소’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급격한 원아 감소를 겪으며 국공립어린이집의 유아반은 직격탄을 맞았다. 내가 운영하는 원의 경우, 작년에 유아교사 인건비의 30%를 지원받기 위한 최소 조건인 '정원의 40%'조차 채우지 못해 결국 지원금이 끊기는 사태를 겪었다. 규정대로라면 인원이 부족한 비장애 유아반을 없애는 것이 맞지만 그럴 경우 비장애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던 장애 아이들마저 길거리로 내몰아야만 했다. 원장으로서 그들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교사 인건비 지원을 포기한 채 오롯이 자부담으로 반을 유지하는 뼈아픈 선택을 해야만 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공보육의 무게를 현장의 원장과 교사들이 온몸으로 떠안고 있는 형국이다. 발달이 느린 아이와 빠른 아이가 한데 어우러져 각자의 속도대로 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사가 아이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출 ‘시간과 여백’이 필요하다. 특성화 프로그램의 가짓수를 늘리는 대신 교사 1인이 담당하는 아동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원아 수가 일시적으로 줄더라도 반을 유지한다면 인건비를 보장해 주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재 진도 채우기에 급급한 파행을 멈추고 진정한 개별화 교육(IEP)을 실천할 수 있다. ■ 유보통합의 진짜 과제, 30년 완전통합의 역사를 잇는 일 다가오는 유보통합이라는 거대한 정책적 변화 속에서 30년 차 원장으로서 가장 두려운 것은, 유아들은 모두 특성화와 선행학습을 좇아 떠나고 어린이집에는 영아들만 남게 되는 파행적 미래다. 나아가 대한민국 ‘장애아 통합보육’의 산실이 영영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성공적인 유보통합은 단순히 행정 부처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집은 지난 30년간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한 교실에서 온종일 함께 부대끼는 ‘완전통합’을 묵묵히 실천해 왔다. 반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국공립 유치원조차 이제야 부분통합에서 완전통합으로 조심스레 전환을 시도하는 걸음마 단계다. 유보통합은 국공립 유치원이 가진 탄탄한 '특수교육 재정 및 행정 인프라'와 국공립어린이집이 30년간 눈물과 땀으로 쌓아온 '완전통합의 철학과 노하우'가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어느 한쪽의 흡수 통합이나 노하우의 사장(死藏)이 아니라, 각 기관의 장점을 살려 '모든 아이를 차별 없이 품는 질 높은 공교육'의 틀을 새롭게 짜야 할 때다. ■ ‘치료실 순례’를 멈추게 할 원내 치료 지원체계 구축 통합보육을 수행하는 어린이집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자, 발달 지연 영유아를 위해 국가가 가장 먼저 확대해야 할 제도는 바로 ‘원내 치료 서비스’다. 지금 부모들이 사교육 시장 못지않게 막대한 비용과 불안감을 쏟아붓는 곳이 사설 발달치료센터다. 하원 시간이 되면 아이를 차에 태우고 이 치료실, 저 치료실을 전전하는 이른바 ‘치료실 순례’는 부모와 아이 모두를 지치게 만든다. 아동의 발달 지원과 조기 개입은 아이가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어린이집 교실 안에서 이루어질 때 최고의 효과를 낸다. 교실 안에서 친구들과 놀이하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특수교사와 언어·놀이 치료사의 개입은 사설 치료실의 제한된 환경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시너지를 만든다. 낯선 치료실을 전전하는 부모의 불안을 덜어주고 진정한 의미의 적기 교육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보육 현장 내에 전문 치료 인력을 배치할 수 있도록 국가의 전폭적인 예산 지원이 시급하다. ■ 부모의 불안을 잠재울 '진짜 적기 교육'을 향해 영유아기는 조기 선행으로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시기가 아니다. 각자의 발달 시계에 맞춰, 나와 다른 타인을 긍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적기 교육'의 골든타임이다. 부모들이 불안감에 쫓겨 획일화된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리지 않으려면, 국가가 흔들림 없는 통합 공보육 시스템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어떤 아이도 배제되지 않고 한 교실에서 숨 쉴 수 있는 든든한 교육 환경, 교사가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지원 체계가 그 시작이다. 아이들은 서로의 다름을 마주하고 기다려주는 교실 안에서 가장 찬란하게 성장한다. 부모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조기 선행의 굴레를 끊어내고, 우리 아이들이 '함께' 커가는 기적을 지켜낼 수 있도록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책임 있는 응답을 내놓아야 한다. |
◼ 영유아 적기교육 보장 연속보도, 아이들의 시간을 지켜주세요⑤ (2026.05.14.)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영유아교육포럼>은 조기 사교육 광풍 속에 대한민국 아이들의 빼앗긴 시간을 되찾기 위해 베이비뉴스에 26인의 릴레이 기고 '아이들의 시간을 지켜주세요'를 시작하였고, 이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보도 형식으로 배포합니다.
4살 아이가 영어학원 레벨테스트를 치르고, 만 5세가 되면 어린이집과 유치원 교실이 텅 비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영유아 교육의 현실입니다. 조기 선행학습은 아이들의 발달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누려야 할 놀이와 탐색의 시간을 빼앗고 있습니다. 영유아 교육 현장의 교사, 연구자, 부모, 정책 전문가 26인은 조기 사교육이 아이들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과 우리 사회가 마주한 교육 현실을 짚고, 국가와 사회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조기가 아닌 ‘적기교육’을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제안합니다. 빨리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제때 자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의 권리입니다.
필자: 조선경(전국 장애아 통합 어린이집협의회 고문)
저출생이 계속되는 가운데, 역설적이게도 보육현장에서는 발달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모든 부모는 내 아이가 남들보다 우수한 인재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 어릴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더 똑똑한 아이로 키우고자 애를 쓴다. 하지만 아이들은 저마다 타고난 능력과 기질, 개성과 강점이 모두 다른 고유한 존재다. 이토록 다채로운 빛깔을 지닌 아이들을 하나의 획일화된 틀에 억지로 맞추려하거나 부모의 조급한 기대를 덧씌우는 일은 오히려 아이가 가진 고유한 잠재력이 건강하게 싹뜨는 것을 가로막는다. 특히나 비교와 경쟁의 사회적 분위가가 만연한 대한민국은 발달이 지연되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당당히 키우기에 녹록지 않은 나라다.
■ 놀이를 잃어버린 아이들과 생존경쟁에 내몰린 현장
여기에 겹친 제도적 과도기는 현장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지난 2024년 12월, 영유아 보육·교육 업무가 교육부로 일원화(유보통합)되었으나, 정작 교육청과 지방정부 차원의 실질적인 행정 및 재정 통합은 여전히 요원한 상태다. 이런 어수선한 틈바구니 속에서 원아 수 감소라는 직격탄을 맞은 영유아 보육 교육기관들은 치열한 생존 경쟁에 내몰렸다. 유아반 아동이 줄어들면서 그나마 힘겹게 유지되던 장애통합반마저 존폐 위기에 처했고, 어린이집들은 유치원에 아이들을 뺏기지 않기 위해 부모들의 입맛에 맞춘 '특별활동'과 '특성화 활동'을 무한경쟁하듯 늘려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결과 아이들의 하루는 촘촘한 스케줄에 쫓기게 되었고, 영유아기에 가장 필수적인 '주도적 놀이 시간'은 턱없이 줄어들었다. 특히 영어나 수, 문자 학습에 치중하는 분위기는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 영유아들에게 폭력이나 다름없다. 아이들은 이해하지도 못하는 과제들을 마치 노동처럼 떠안게 되고, 결국 교사가 아이 대신 학습지의 빈칸을 채워 가정으로 보내는 웃지 못할 촌극까지 벌어진다.
장애아동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아이의 개별적인 수준에 맞춰 목표를 설정하고 지원하는 '개별화교육(IEP)'이다. 그러나 지금 현장의 교사들은 미술, 과학, 한글, 수 교재를 든 아이들을 한 명씩 붙잡아 앉혀놓고 그날의 진도 분량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아이의 발달을 위한 진정한 교육의 시간이, 그저 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과물 생산'과 '과제 이행'의 시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 누구를 위한 지원인가, 교사를 옥죄는 기형적 구조
이러한 파행은 기형적인 구조에서 기인한다. 외부 강사가 미리 세팅된 프로그램을 30분 남짓 반 전체 원아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특별활동은 애초에 개별적 목표 설정이 불가능하다. 강사 없이 교재만 구매해 교사가 진행하는 특성화 활동 역시, 과정을 개발한 업체의 이윤 구조에 얽매여 매주 소화해야 할 4회차 분량의 교재들이 과목별로 쏟아진다. 게다가 부모 부담금을 줄이겠다며 특별활동과 특성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최근의 정책 방향은 현장의 파행을 도리어 부추긴다. 더 넓은 세상에 나가 현장학습을 하고 자연을 만끽하며 외부 경험을 넓혀야 할 아이들이 비용 지원이라는 명목 아래 좁은 교실에 갇혀 매일매일 교재와 씨름하고 있는 꼴이다.
현장을 옥죄는 행정 구조도 문제다. 지역별 보육정책위원회에서 해마다 현장학습비 4만 원, 특성화비 3만 원, 행사비 2만 원... 식으로 세세하게 항목을 쪼개어 상한선을 정해두고, 이를 다시 개인별 사용액으로 세세하게 정산하도록 강제하는 업무는 교사들의 에너지를 심각하게 고갈시킨다. 실제로 특별활동을 유독 많이 하는 일부 사립유치원의 교사들이 정작 아이들과 깊이 있는 놀이를 나누지 못하고 외부 강사의 시간표에 맞춰 아이들을 통제하는 '일정 관리자' 역할로 전락했다는 현장의 자조 섞인 한탄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결국, 점점 줄어드는 아이들을 기관에 데려오기 위해 부모의 불안과 경쟁심을 자극하고 입맛에 맞추는 파행적 영유아 교육 구조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뼈아픈 현실이다.
■ 비장애 아동만 바라보는 탁상행정, 교육부의 중점과제가 놓친 것들
교육부는 올해 유보통합의 중점과제로 '5세 이음교육', '독서교육 강화', '방과후 프로그램 활성화'를 내세웠다. 겉보기에는 교육의 질을 높이는 훌륭한 정책 같지만, 발달장애 아동이 함께 숨 쉬는 통합보육 현장의 관점에서 이는 철저한 배제이자 또 다른 폭력이다.
첫째, 유치원·어린이집과 초등학교의 연계를 돕는다는 '5세 이음교육'은 철저히 생물학적 나이만을 기준으로 삼은 맹점을 지닌다. 발달장애 아동은 실제 나이가 5세라 하더라도 발달 연령은 2~3세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초등학교 교실에 앉아있기 위한 착석 훈련이나 기초 학습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자조 기술을 익히고 타인과 눈을 맞추는 사회성 훈련이다. 발달 단계를 무시한 채 연령군으로 묶어버린 이음교육은 장애 아동에게 매일 뼈아픈 실패감만 안겨줄 뿐이다.
둘째, '독서교육 강화' 역시 인지 중심의 획일적 접근이다. 언어 발달이 지연되거나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 일괄적인 독서 활동을 강요하는 것은 교육적 의미가 없다. 이들에게는 활자를 읽어내는 것보다, 그림 카드로 자신의 요구를 표현하는 보완대체의사소통(AAC)이나 교사와 함께 책의 그림을 보며 상호작용하는 개별화된 접근이 훨씬 절실하다.
셋째, '방과후 프로그램 활성화'는 통합 현장의 현실을 가장 모르는 정책이다. 외부 강사가 주도하는 다인수 위주의 방과후 특성화 프로그램은 전개 속도가 빠르고 시청각적 자극이 강해 발달장애 아동이 참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이들은 의미 없이 교실 주변을 배회하거나 쏟아지는 자극에 힘들어하다 결국 문제행동을 일으키게 된다. 정규 일과만으로도 쉽게 피로해지고 에너지가 고갈되는 장애 아동에게 필요한 것은 쉼표가 있는 휴식이나 1:1 맞춤형 치료 지원이지 결코 쉴 틈 없이 돌아가는 방과후 프로그램이 아니다.
결국 교육부의 핵심 과제들은 모두 '학습할 준비가 된 비장애 아동'만을 상정하고 설계된 반쪽짜리 정책이다. 진정한 유보통합이라면 한 가지 기준을 세워두고 아이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장 느린 아이의 보폭까지 품을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 개별화 교육의 전제 조건, 인건비 보장과 교사 대 아동 비율 축소
지금 정부는 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기타필요경비'와 같은 명목으로 부모에게 쥐어주는 지원을 늘리고 있지만, 이는 파행적 특별활동을 심화시키는 부작용만 낳고 있다. 현장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부모 개별 지원금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보육 기반을 지탱할 본질적인 ‘운영비 지원’과 ‘교사 대 아동 비율 축소’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급격한 원아 감소를 겪으며 국공립어린이집의 유아반은 직격탄을 맞았다. 내가 운영하는 원의 경우, 작년에 유아교사 인건비의 30%를 지원받기 위한 최소 조건인 '정원의 40%'조차 채우지 못해 결국 지원금이 끊기는 사태를 겪었다. 규정대로라면 인원이 부족한 비장애 유아반을 없애는 것이 맞지만 그럴 경우 비장애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던 장애 아이들마저 길거리로 내몰아야만 했다. 원장으로서 그들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교사 인건비 지원을 포기한 채 오롯이 자부담으로 반을 유지하는 뼈아픈 선택을 해야만 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공보육의 무게를 현장의 원장과 교사들이 온몸으로 떠안고 있는 형국이다.
발달이 느린 아이와 빠른 아이가 한데 어우러져 각자의 속도대로 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사가 아이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출 ‘시간과 여백’이 필요하다. 특성화 프로그램의 가짓수를 늘리는 대신 교사 1인이 담당하는 아동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원아 수가 일시적으로 줄더라도 반을 유지한다면 인건비를 보장해 주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재 진도 채우기에 급급한 파행을 멈추고 진정한 개별화 교육(IEP)을 실천할 수 있다.
■ 유보통합의 진짜 과제, 30년 완전통합의 역사를 잇는 일
다가오는 유보통합이라는 거대한 정책적 변화 속에서 30년 차 원장으로서 가장 두려운 것은, 유아들은 모두 특성화와 선행학습을 좇아 떠나고 어린이집에는 영아들만 남게 되는 파행적 미래다. 나아가 대한민국 ‘장애아 통합보육’의 산실이 영영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성공적인 유보통합은 단순히 행정 부처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집은 지난 30년간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한 교실에서 온종일 함께 부대끼는 ‘완전통합’을 묵묵히 실천해 왔다. 반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국공립 유치원조차 이제야 부분통합에서 완전통합으로 조심스레 전환을 시도하는 걸음마 단계다. 유보통합은 국공립 유치원이 가진 탄탄한 '특수교육 재정 및 행정 인프라'와 국공립어린이집이 30년간 눈물과 땀으로 쌓아온 '완전통합의 철학과 노하우'가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어느 한쪽의 흡수 통합이나 노하우의 사장(死藏)이 아니라, 각 기관의 장점을 살려 '모든 아이를 차별 없이 품는 질 높은 공교육'의 틀을 새롭게 짜야 할 때다.
■ ‘치료실 순례’를 멈추게 할 원내 치료 지원체계 구축
통합보육을 수행하는 어린이집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자, 발달 지연 영유아를 위해 국가가 가장 먼저 확대해야 할 제도는 바로 ‘원내 치료 서비스’다. 지금 부모들이 사교육 시장 못지않게 막대한 비용과 불안감을 쏟아붓는 곳이 사설 발달치료센터다. 하원 시간이 되면 아이를 차에 태우고 이 치료실, 저 치료실을 전전하는 이른바 ‘치료실 순례’는 부모와 아이 모두를 지치게 만든다.
아동의 발달 지원과 조기 개입은 아이가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어린이집 교실 안에서 이루어질 때 최고의 효과를 낸다. 교실 안에서 친구들과 놀이하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특수교사와 언어·놀이 치료사의 개입은 사설 치료실의 제한된 환경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시너지를 만든다. 낯선 치료실을 전전하는 부모의 불안을 덜어주고 진정한 의미의 적기 교육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보육 현장 내에 전문 치료 인력을 배치할 수 있도록 국가의 전폭적인 예산 지원이 시급하다.
■ 부모의 불안을 잠재울 '진짜 적기 교육'을 향해
영유아기는 조기 선행으로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시기가 아니다. 각자의 발달 시계에 맞춰, 나와 다른 타인을 긍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적기 교육'의 골든타임이다. 부모들이 불안감에 쫓겨 획일화된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리지 않으려면, 국가가 흔들림 없는 통합 공보육 시스템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어떤 아이도 배제되지 않고 한 교실에서 숨 쉴 수 있는 든든한 교육 환경, 교사가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지원 체계가 그 시작이다. 아이들은 서로의 다름을 마주하고 기다려주는 교실 안에서 가장 찬란하게 성장한다. 부모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조기 선행의 굴레를 끊어내고, 우리 아이들이 '함께' 커가는 기적을 지켜낼 수 있도록 이제는 국가와 사회가 책임 있는 응답을 내놓아야 한다.
※ 문의 :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천은아 책임연구원(02-797-4044/ 내선번호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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