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교육청진로교육원에서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의 진로진학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상대평가에서 친구보다 더 잘해야 원하는 대학 입학에 성공할 수 있다’가 대한민국 입시 공식이다. ‘성공진학’과 ‘성장진학’의 의미를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입시에 합격해서 성공진학 하더라도, 성적에 맞춰 학과나 진로를 정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성장’시키는 진학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방황하는 것을 많이 본다.
2024년 한 해 동안 노워리 기자단 활동을 해오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회원들의 성인 자녀 인터뷰가 기획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호기심이 동했다. 대학생 아들 둘을 둔 나는 이제 막 1년밖에 되지 않은 회원인 터라, 오래된 후원회원과 이제 곧 대학생이 된다는 그 아들과의 만남이 기대되었다.
지난 1월 중순, 15년 회원인 전인선 선생님과 아들 전명준 님을 만났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물리교사이신데 마침 방학이라 함께 만날 수 있었다. 명준 님과 단둘이 얘기하기 전에 부모님까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재순(이하 고) : 원하는 전공의 대학에 합격하셨다니 축하드려요. 고생 많이 하셨네요. 사학과에 입학하신다고 들었어요. 역사를 원래 좋아하셨어요?
전명준(이하 명) : 고맙습니다. 어렸을 때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보면서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하고 고대사를 탐구하는 과정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어요. 고대사도 관심이 많고 지금은 서양사, 현대사 두루 공부하고 싶어요. 평상시에 역사 이야기를 친구들과 하고 싶어도 아이들은 입시랑 관련 있는 사실만 물어보고, 그 배경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고 하면 끊어버리더라고요. 사실 저는 그 맥락을 더 얘기해주고 싶은데 말이죠.
어머니 전인선(이하 어머니) : 명준이는 책을 좋아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어릴 때에 비해 독서량이 줄긴 했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를 파고들더라고요. 역사, 인문, 어떤 때는 희랍어까지요. 그래서 제가 묻기도 했어요. “희랍어는 죽은 언어 아니야?”라고요. 명준이는 한번 꽂히면 그냥 파고드는 성향이에요.

'사교육 없이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자' 합의하셨나요?
고 : 아버님도 함께 오셨는데요. 두 분이 자녀 양육에서 사교육 활용을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회원이 된 지 이제 1년밖에 안됐어요. 어머님이 무려 15년이나 회원이시고, 청주지역 등대모임을 같은 기간 동안 해오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한편으로 아버님 생각도 궁금하고요. 부모님께서 공식적으로 ‘우리의 소신대로 사교육 없이,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도록 해보자’고 합의하셨나요?
어머니 : 그런 건 없었어요. 남편이랑 우리가 먼저 주도하지 않고 기다렸어요. 애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때 반응해줬어요. 그러다 보니 아이가 먼저 학원을 꼭 다녀야 하는지, 친구들한테 들은 정보, 학원 평가, 어떻게 훈련시키는지 알아보고 저한테 말하더라고요(웃음).
고2가 되는 둘째는 올해 인터넷 강의를 등록해 달라고 하고, 중3이 되는 막내는 1대1 과외 수업을 요청했어요. 과외 교사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인터넷으로 알아볼까 생각 중이에요. 사실 명준이가 사교육을 싫어하다 보니 둘째와 셋째에게도 먼저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보내달라 하는 건 알아보죠. 본인이 먼저 알아보고 요청하게 하니까 자신의 결정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아버지 전원배 (이하 아버지) : 아이들이 숙제할 때 저한테도 많이 물어보는 걸 경험하면서 아이들과 제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전에는 부모로서 뭔가 역할을 안 하는 것 같아서 언제 사교육을 시작해야 하는 건가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필요한 사교육 정보는 스스로 알아보고 본인이 결정해서 요청하면 그에 맞춰주고 있어요.
고 : 학업성적으로 인해 집집마다 부모 자식 갈등이 심하잖아요. 그런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요? 어머님은 명준이가 좋아하는 것만 파고든다 하셨잖아요. 그럴 때 어떻게 반응하셨어요?
어머니 : 다 비슷하죠. 뭐(웃음). 밥 먹을 때 공부 얘기 하면 갑자기 아들 얼굴 표정이 확 나빠지고, 그러면 딱 입 다물게 되고. 남편이 화를 낸 적도 몇 번 있긴 했어요. 저희 사는 곳이 충북 오송인데, 비평준화 지역이에요. 중3 때, 집 근처 오송고등학교 갈 성적이 안정권 기준으로 보면 아슬아슬하게 넘는 정도였거든요. 고입을 앞두고 중학교부터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게 아이도 저도 힘들었어요. 가고 싶은 학교를 가까이 두고 먼 지역 학교를 알아봐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요. 게다가 그 무렵, 명준이가 학교 선택 문제, 친구 문제 등으로 방황이 심했어요. 그때 남편이 근무하던 학교가 음성고등학교였는데, 아들한테 적극 권하더라고요.
고 : 아버님은 음성고에 다니는 아들, 명준이를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시면서 추천하셨나요?
아버지 : 기숙사가 있는 학교예요. 작은 학교지만 온정이 남아 있는 곳이죠. 제가 근무할 때 1학년 통합과학을 가르쳤어요. 경쟁이 과열되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라 명준이도 잘 적응하고 적성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자기주도적 습관을 기를 수 있겠구나 싶었고요. 제가 아내를 설득하고, 아이에게도 권했어요. 그런데 음성고 입학하고 나서 나중에 보니 명준이 성적이면 집에서 가까운 오송고도 충분히 갈 성적이었더라고요.

고 : 부모님께서 아들의 사춘기와 고등학교 입시로 힘든 시기를 같이 지켜봐 주셨잖아요. 고등학교 입학 후에 대학 진학까지, 부모님 입장은 어떠셨어요? 명준 님도 고등학교시절을 되돌아볼 때 소회랄까요. 정리해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어머니 :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고1 때부터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정했던 것 같아요. 본인이 잘하는 분야라 생각하고 더 파고드는 것 같았고요. 가까운 학교 갈 수 있는 성적이었는데 음성고로 왔다는 걸 알고, 고1 때 좀 힘들어 했어요. 자퇴까지 고민했으니까요.
아버지 : 명준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원하는 방향과 아들의 성향은 많이 달랐어요. 아들이 자기 소신이 강하기도 하고 관심 분야도 확실해서 결국 아들에게 맞추면서 기다려줬어요. 명준이에게 꼭 4년제 대학 안가도 되니 원하는 것을 해라, 그리고 차차 길을 찾아보자고 얘기했는데 아들이 표정이 밝아지고 편안해졌어요. 돌이켜보면 결국 아이가 스스로 좋아하고 또 잘하는 분야를 찾도록 기다려 주는 과정이었어요. 지금도 그 과정에 있고요.
명 : 1학년 성적이 좋진 않아요. 대학을 크게 염두에 두진 않았고 사실 못 갈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잘하는 역사 분야 위주로 스트레스 많이 안 받으면서 혼자 공부했는데, 고3이 되어 관련 학과로도 진학이 가능하고 수도권이 아니라면 대학도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좋아하는 역사가 저의 뿌리가 되어 다른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최근에는 편입이나 복수전공까지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고 : 부모가 할 일은 자녀가 독립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란 걸 새삼 공감하게 되네요. 부모는 '아이를 지켜보고 지지해 주면서 그 과정에 함께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위안이 됩니다. 오늘 인터뷰에 부모님이 오셔서 진심 어린 말씀 해주신 것 역시. 명준 님에게 추억이 되겠어요. 지금부터는 명준 님과 좀더 이야기 나눌게요.

고 : 학교 정규수업이 끝나고 학원에 안 가면서 기숙사에 있는 시간은 주로 어떻게 보냈어요?
명 : 고등학교 생활하면서 저에게 변화가 있었어요. 고1 때는 집 근처 학교로 갔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적응도 안돼서 무기력하게 보냈어요. 혼자 있고 싶은 시간도 많았고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떻게 보면 대인 기피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데 지금은 거리낌 없이 제 의견을 말하거나 먼저 다가가기도 해요. 돌이켜 보면 음성고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 부분을 아빠가 의도하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성고가 학교 부지는 크지만 한 학년이 일곱 반밖에 안 되는 학교예요. 확실히 애들이 먼저 다가와 주고 말도 걸어줘서 좋았어요. 모두 음성 출신인데 저만 청주 출신이라 소외감이 좀 들었어요. 첫 수련회 가서도 혼자 있긴 했었는데 애들이 좋으니까 금방 괜찮아지더라고요. 축제 때는 여자애가 일부러 관심도 보여줘서 기분 좋았어요(웃음). 점점 제 성격도 밝아지면서 제가 가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하며 보냈어요.
고 :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명 : 다른 애들처럼 나도 꼭 다녀야 하는 건가? (아닌 것 같다)싶기도 하다가 막상 다닐 생각하면 귀찮기도 했고, 솔직히 지금도 학원에 다녔어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없진 않아요. 후회가 된다기보다 그냥 그렇다는 거죠. 하지만, 글쎄요. 시간을 돌린다 하더라도 저는 그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것 하며 놀 것 같아요(웃음). 다른 애들은 학원 다니며 성적 관리하는데 저는 학원 안 가는 게 마음이 편했어요. 그래도 제가 원하는 학과에 이렇게 합격했잖아요(웃음).
고 : 수시모집으로 지원하고 모두 합격했다고 들었어요. 어떤 전형을 지원했고, 합격했는지 그 과정을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명 : 강릉원주대만 학생부교과전형이고 나머지 4개는 모두 학생부종합전형에 지원했어요. 강릉원주대 사학과 2개 전형에 응시했고 나머지 4개도 충북대, 공주대 등 집에서 가까운 거점국립대에 지원했는데 모두 합격했어요. 강릉원주대만 제가 원하는 사학과라, 집에서 멀어 고민됐지만 학과를 보고 최종 등록했어요.
고 : 학교 선생님들과 진로진학 상담을 구체적으로 했나요?
명 : 제가 역사에 대해 너무 확고하다 보니까 성적을 올려서 더 좋은 대학 가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상담할 때 계속 들었어요. 고1 때는 학교 적응, 친구 관계 등 고민이 많아서 고2가 돼서도 대학 진학을 크게 알아보지 않았고, 제가 관심 있는 분야만 공부했어요. 고3이 돼서 여러 가능성이 보이니까 (그제서야) 대학을 가야겠다 생각하고 공부했어요. 제가 알아보기도 하고, 학교 선생님한테 많이 물어봤죠.

고 : 학교 선생님께 도움을 받았던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면요?
명 : 다른 애들이 안하는 역사 관련 질문을 계속 해서 선생님이 상당히 피곤하지 않으셨을까 생각은 들어요(웃음). 예를 들어 ‘폴란드 분할’이라는 수행평가 주제를 조사하다 선생님께 찾아가서 꼬치꼬치 질문했어요. 선생님은 세계사를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것에 놀라시면서 역사학과 안에 전공분야가 아주 다양하다고 알려주셨어요. 저를 희귀하게 보셨을 것 같아요. 선생님의 시선을 받으니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긴 했어요.
고 : 대학에 가서 역사의 어떤 분야를 공부하고 싶었어요?
명 : 친구들이 제가 역사와 관련해서 얘기할 때는 갑자기 열정적으로 변하니까 ‘너는 이 분야로 상위권 대학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떠냐?’고도 했어요. 그런데 그때는 제가 입시랑 연결지어서 무언가를 찾아보고 공부하고 기록하는 걸 좀 귀찮아했어요. 제가 관심이 가면 자연스럽게 끝까지 검색해 보는데, 어느 대학이랑 무슨 학과를 목표로 잡고 공부하는 것은 관심도 없었어요. 지금은 서양사나 세계사를 더 폭넓게 알아보고 싶어요. 한국사도 중요하지만 우선 세계의 큰 변화나 흐름을 공부하고 싶어요. 정치도 관심이 많고 국제 정세도 궁금한 점이 많아요. 더 구체적인 주제는 대학에 가면 정해질 것 같아요.
살기 싫었을 때, 저를 일으킨 건
고 : 성적이나 입시 문제로 부모님과 갈등 상황을 겪기도 했나요?
명 : 아까 말한 것처럼 고1 때 방황하면서 공부를 안했어요. 부모님은 성적표보다는 제가 새로운 고등학교 적응하지 못하는 걸 보고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때 저는 그냥 만사가 귀찮고 혼자 있고 싶었고 무기력했거든요. 고1, 4~5월이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어요. 부모님과 갈등도 하고 스트레스 상황이었어요.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그냥 살기가 싫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를 일으킨 것은 종종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혼자 다녀왔던 경험이에요.
고 :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갔었군요. 주로 다닌 곳은 어디고 무엇을 보며 힘을 얻었어요?
명 : 제가 아주 좋아하는 일이에요. 역사를 파고들다 보니까 유물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서울까지 갔어요. 시골에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서울까지 가야죠. 자주 갔어요. 국립중앙박물관이나 현대미술관,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도 혼자 다녔어요. 중2 때는 할머니랑 가기도 했지만 그 후로는 혼자 가서 며칠 동안 친척 집에 가서 있다가 오기도 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국 청나라 특별전시관, 그리스·로마실 상설전시관을 둘러볼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왔어요. 우리나라 전시관도 좋아했어요. 구한말~조선시대보다 고려를 비롯한 중세, 그 전 고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관심이 많이 가요. 그 오랜 시간을 견디고 버텨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거든요. 혼자 가면 한나절이나 하루 종일도 있어요. 간송미술관 혹시 가보셨어요? 무료인데 시대별 미술품 전시를 해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에요. 대구 간송미술관도 가보려고요.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역사에 파고들었던 것도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역사 속 인물이나 유물을 보는 시간은 ‘삶이 이어진다’는 느낌과 함께 힘들었던 저에게 뭔지 모를 삶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어요. 그래서 저는 역사에 대한 애정이 깊어요. 어찌 보면 저를 살게 한 과목이잖아요.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한국사능력 검정시험 1급도 땄어요.
고 : 와, 중1이 1급 따기 쉽지 않은데 정말 역사 덕후였군요.
명 : 네. 그때 시험감독 선생님도 놀라셨고, 친구들도 놀라워했어요(웃음).
고 : 친구들이 명준 님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뭐라고 할 것 같아요?
명 : 역사를 좋아하고 역사 얘기할 때는 눈빛이 살아나는 인간? 읽은 책의 배경지식이 생각보다 많은 친구. 몸이 가벼워서 균형을 잘 잡는 아이(웃음).
고 : 그렇구나. 명준 님, 이야기를 참 잘하네요.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세요?
명 : 네. 어떤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거나 내 생각을 피력하거나, 토론하는 걸 좋아해요. 역사 말고도 최근에 읽었던 책과 관련해서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최근 12.3 내란 사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망했구나 걱정하기도 했지만 시민의식이 높아서 앞으로 잘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정치 얘기도 즐기고, 미국, 중국, 일본 등 국제 정세를 알아보는 것도 좋아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을 때는 부모님이 규제도 하셨어요. 밥 먹을 때 입만 열면 역사 얘기가 계속 나오니까 이제 좀 그만 하라고, 하하하!

부모님은 사학과가 배고픈 학문이라 말하시면서
고 :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잘 알아요? 엄마가 지역등대모임의 등대장으로 활동하는 거 보면서 평소에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명 : 엄마랑 회원MT 따라가서 애들이랑 놀았던 기억나요. 중2 이후에는 여자애들이랑 만나는 게 쑥쓰러워서 안 따라갔지만요. 엄마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분이세요. 지금은 상담자격증을 준비하고 계세요. 저는 엄마를 보면 나이랑 상관없이 진로는 계속해서 자신이 찾아가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엄마는 책을 정말 좋아하고 많이 읽으세요. 집에 책이 아주아주 많아요. 책이 집이에요(웃음).
엄마는 상담 쪽 책을 주로 보시고, 아빠는 물리학이나 수학, 역사, 철학 등 아주 다양하게 보세요. 그래서 최근에도 제가 엄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을 사드렸어요.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거든요. 엄마가 이제 동생들까지 졸업시키고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다 하신 말을 우연히 듣고, 사드렸어요. 받으시고 정말 좋아하셨어요. 책 보면서 좋은 장소를 실제로 알아봐야겠다고 하시면서.
고 : 그래요? 명준 님은 엄마한테 책도 선물하는 아들이구나. 이 자리를 빌어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을 해보실래요?
명 : 우리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에 비해 제 일상과 생각을 존중해 주시는 게 좋아요. 그래서 감사드려요. 역사학과가 취업을 생각하면 배고픈 학문이라고 하시면서도 끝까지 지지해 주셨어요. 만약 졸업 후에 취업하기 유망한 과를 골라서 상경계열이나 이공계열로 저를 몰아세우면서 공부하라고 다그쳤다면 저는 못 견뎠을 거예요. 초등학교 때는 수학도 엄청 강조하셨던 것 같긴 한데 제가 좋아하는 분야로 가도록 지원해 주셨어요. 그런 부분이 참 감사해요.
제가 역사를 전공하지만 역사는 제 뿌리로 삼고 다른 분야에서 일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최근에는 생물 분류학이나 적정 기술, 생체 모방 기술에도 관심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앞으로는 직장도 투 잡, 쓰리 잡 뛰는 시대가 되었고요. 무엇보다 제가 하고 싶은 분야를 잘 찾아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고 : 명준 님은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를 확실히 찾아서 도전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면서 힘든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간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갖든지 올곧은 역사의식을 갖겠다는 명준 님을 응원하겠습니다.
명 : 저도 감사합니다.
명준 님은 자신의 적성을 충분히 고려해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분야에 지원하고 성공까지 한 ‘성장진학’의 좋은 사례다. 명준 님이 꿈꾸는 방향을 함께 바라 보면서 그의 속도를 충분히 존중한 지혜로운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셨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15년 회원, 전인선 선생님의 가족 모두가 자녀들의 성장을 통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길 기도한다.
■ 글 : 노워리기자단 고재순
나는 교육청진로교육원에서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의 진로진학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상대평가에서 친구보다 더 잘해야 원하는 대학 입학에 성공할 수 있다’가 대한민국 입시 공식이다. ‘성공진학’과 ‘성장진학’의 의미를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입시에 합격해서 성공진학 하더라도, 성적에 맞춰 학과나 진로를 정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성장’시키는 진학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방황하는 것을 많이 본다.
2024년 한 해 동안 노워리 기자단 활동을 해오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회원들의 성인 자녀 인터뷰가 기획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호기심이 동했다. 대학생 아들 둘을 둔 나는 이제 막 1년밖에 되지 않은 회원인 터라, 오래된 후원회원과 이제 곧 대학생이 된다는 그 아들과의 만남이 기대되었다.
지난 1월 중순, 15년 회원인 전인선 선생님과 아들 전명준 님을 만났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물리교사이신데 마침 방학이라 함께 만날 수 있었다. 명준 님과 단둘이 얘기하기 전에 부모님까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재순(이하 고) : 원하는 전공의 대학에 합격하셨다니 축하드려요. 고생 많이 하셨네요. 사학과에 입학하신다고 들었어요. 역사를 원래 좋아하셨어요?
전명준(이하 명) : 고맙습니다. 어렸을 때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보면서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하고 고대사를 탐구하는 과정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어요. 고대사도 관심이 많고 지금은 서양사, 현대사 두루 공부하고 싶어요. 평상시에 역사 이야기를 친구들과 하고 싶어도 아이들은 입시랑 관련 있는 사실만 물어보고, 그 배경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고 하면 끊어버리더라고요. 사실 저는 그 맥락을 더 얘기해주고 싶은데 말이죠.
어머니 전인선(이하 어머니) : 명준이는 책을 좋아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어릴 때에 비해 독서량이 줄긴 했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를 파고들더라고요. 역사, 인문, 어떤 때는 희랍어까지요. 그래서 제가 묻기도 했어요. “희랍어는 죽은 언어 아니야?”라고요. 명준이는 한번 꽂히면 그냥 파고드는 성향이에요.
'사교육 없이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자' 합의하셨나요?
고 : 아버님도 함께 오셨는데요. 두 분이 자녀 양육에서 사교육 활용을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회원이 된 지 이제 1년밖에 안됐어요. 어머님이 무려 15년이나 회원이시고, 청주지역 등대모임을 같은 기간 동안 해오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한편으로 아버님 생각도 궁금하고요. 부모님께서 공식적으로 ‘우리의 소신대로 사교육 없이,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도록 해보자’고 합의하셨나요?
어머니 : 그런 건 없었어요. 남편이랑 우리가 먼저 주도하지 않고 기다렸어요. 애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때 반응해줬어요. 그러다 보니 아이가 먼저 학원을 꼭 다녀야 하는지, 친구들한테 들은 정보, 학원 평가, 어떻게 훈련시키는지 알아보고 저한테 말하더라고요(웃음).
고2가 되는 둘째는 올해 인터넷 강의를 등록해 달라고 하고, 중3이 되는 막내는 1대1 과외 수업을 요청했어요. 과외 교사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인터넷으로 알아볼까 생각 중이에요. 사실 명준이가 사교육을 싫어하다 보니 둘째와 셋째에게도 먼저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보내달라 하는 건 알아보죠. 본인이 먼저 알아보고 요청하게 하니까 자신의 결정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아버지 전원배 (이하 아버지) : 아이들이 숙제할 때 저한테도 많이 물어보는 걸 경험하면서 아이들과 제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전에는 부모로서 뭔가 역할을 안 하는 것 같아서 언제 사교육을 시작해야 하는 건가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필요한 사교육 정보는 스스로 알아보고 본인이 결정해서 요청하면 그에 맞춰주고 있어요.
고 : 학업성적으로 인해 집집마다 부모 자식 갈등이 심하잖아요. 그런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요? 어머님은 명준이가 좋아하는 것만 파고든다 하셨잖아요. 그럴 때 어떻게 반응하셨어요?
어머니 : 다 비슷하죠. 뭐(웃음). 밥 먹을 때 공부 얘기 하면 갑자기 아들 얼굴 표정이 확 나빠지고, 그러면 딱 입 다물게 되고. 남편이 화를 낸 적도 몇 번 있긴 했어요. 저희 사는 곳이 충북 오송인데, 비평준화 지역이에요. 중3 때, 집 근처 오송고등학교 갈 성적이 안정권 기준으로 보면 아슬아슬하게 넘는 정도였거든요. 고입을 앞두고 중학교부터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게 아이도 저도 힘들었어요. 가고 싶은 학교를 가까이 두고 먼 지역 학교를 알아봐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요. 게다가 그 무렵, 명준이가 학교 선택 문제, 친구 문제 등으로 방황이 심했어요. 그때 남편이 근무하던 학교가 음성고등학교였는데, 아들한테 적극 권하더라고요.
고 : 아버님은 음성고에 다니는 아들, 명준이를 어떤 모습으로 상상하시면서 추천하셨나요?
아버지 : 기숙사가 있는 학교예요. 작은 학교지만 온정이 남아 있는 곳이죠. 제가 근무할 때 1학년 통합과학을 가르쳤어요. 경쟁이 과열되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라 명준이도 잘 적응하고 적성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자기주도적 습관을 기를 수 있겠구나 싶었고요. 제가 아내를 설득하고, 아이에게도 권했어요. 그런데 음성고 입학하고 나서 나중에 보니 명준이 성적이면 집에서 가까운 오송고도 충분히 갈 성적이었더라고요.
고 : 부모님께서 아들의 사춘기와 고등학교 입시로 힘든 시기를 같이 지켜봐 주셨잖아요. 고등학교 입학 후에 대학 진학까지, 부모님 입장은 어떠셨어요? 명준 님도 고등학교시절을 되돌아볼 때 소회랄까요. 정리해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어머니 :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고1 때부터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정했던 것 같아요. 본인이 잘하는 분야라 생각하고 더 파고드는 것 같았고요. 가까운 학교 갈 수 있는 성적이었는데 음성고로 왔다는 걸 알고, 고1 때 좀 힘들어 했어요. 자퇴까지 고민했으니까요.
아버지 : 명준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원하는 방향과 아들의 성향은 많이 달랐어요. 아들이 자기 소신이 강하기도 하고 관심 분야도 확실해서 결국 아들에게 맞추면서 기다려줬어요. 명준이에게 꼭 4년제 대학 안가도 되니 원하는 것을 해라, 그리고 차차 길을 찾아보자고 얘기했는데 아들이 표정이 밝아지고 편안해졌어요. 돌이켜보면 결국 아이가 스스로 좋아하고 또 잘하는 분야를 찾도록 기다려 주는 과정이었어요. 지금도 그 과정에 있고요.
명 : 1학년 성적이 좋진 않아요. 대학을 크게 염두에 두진 않았고 사실 못 갈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잘하는 역사 분야 위주로 스트레스 많이 안 받으면서 혼자 공부했는데, 고3이 되어 관련 학과로도 진학이 가능하고 수도권이 아니라면 대학도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좋아하는 역사가 저의 뿌리가 되어 다른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최근에는 편입이나 복수전공까지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고 : 부모가 할 일은 자녀가 독립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란 걸 새삼 공감하게 되네요. 부모는 '아이를 지켜보고 지지해 주면서 그 과정에 함께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위안이 됩니다. 오늘 인터뷰에 부모님이 오셔서 진심 어린 말씀 해주신 것 역시. 명준 님에게 추억이 되겠어요. 지금부터는 명준 님과 좀더 이야기 나눌게요.
고 : 학교 정규수업이 끝나고 학원에 안 가면서 기숙사에 있는 시간은 주로 어떻게 보냈어요?
명 : 고등학교 생활하면서 저에게 변화가 있었어요. 고1 때는 집 근처 학교로 갔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적응도 안돼서 무기력하게 보냈어요. 혼자 있고 싶은 시간도 많았고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떻게 보면 대인 기피라고 해야 될까요? 그런데 지금은 거리낌 없이 제 의견을 말하거나 먼저 다가가기도 해요. 돌이켜 보면 음성고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 부분을 아빠가 의도하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성고가 학교 부지는 크지만 한 학년이 일곱 반밖에 안 되는 학교예요. 확실히 애들이 먼저 다가와 주고 말도 걸어줘서 좋았어요. 모두 음성 출신인데 저만 청주 출신이라 소외감이 좀 들었어요. 첫 수련회 가서도 혼자 있긴 했었는데 애들이 좋으니까 금방 괜찮아지더라고요. 축제 때는 여자애가 일부러 관심도 보여줘서 기분 좋았어요(웃음). 점점 제 성격도 밝아지면서 제가 가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하며 보냈어요.
고 :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명 : 다른 애들처럼 나도 꼭 다녀야 하는 건가? (아닌 것 같다)싶기도 하다가 막상 다닐 생각하면 귀찮기도 했고, 솔직히 지금도 학원에 다녔어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없진 않아요. 후회가 된다기보다 그냥 그렇다는 거죠. 하지만, 글쎄요. 시간을 돌린다 하더라도 저는 그 시간에 제가 하고 싶은 것 하며 놀 것 같아요(웃음). 다른 애들은 학원 다니며 성적 관리하는데 저는 학원 안 가는 게 마음이 편했어요. 그래도 제가 원하는 학과에 이렇게 합격했잖아요(웃음).
고 : 수시모집으로 지원하고 모두 합격했다고 들었어요. 어떤 전형을 지원했고, 합격했는지 그 과정을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명 : 강릉원주대만 학생부교과전형이고 나머지 4개는 모두 학생부종합전형에 지원했어요. 강릉원주대 사학과 2개 전형에 응시했고 나머지 4개도 충북대, 공주대 등 집에서 가까운 거점국립대에 지원했는데 모두 합격했어요. 강릉원주대만 제가 원하는 사학과라, 집에서 멀어 고민됐지만 학과를 보고 최종 등록했어요.
고 : 학교 선생님들과 진로진학 상담을 구체적으로 했나요?
명 : 제가 역사에 대해 너무 확고하다 보니까 성적을 올려서 더 좋은 대학 가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상담할 때 계속 들었어요. 고1 때는 학교 적응, 친구 관계 등 고민이 많아서 고2가 돼서도 대학 진학을 크게 알아보지 않았고, 제가 관심 있는 분야만 공부했어요. 고3이 돼서 여러 가능성이 보이니까 (그제서야) 대학을 가야겠다 생각하고 공부했어요. 제가 알아보기도 하고, 학교 선생님한테 많이 물어봤죠.
고 : 학교 선생님께 도움을 받았던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면요?
명 : 다른 애들이 안하는 역사 관련 질문을 계속 해서 선생님이 상당히 피곤하지 않으셨을까 생각은 들어요(웃음). 예를 들어 ‘폴란드 분할’이라는 수행평가 주제를 조사하다 선생님께 찾아가서 꼬치꼬치 질문했어요. 선생님은 세계사를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것에 놀라시면서 역사학과 안에 전공분야가 아주 다양하다고 알려주셨어요. 저를 희귀하게 보셨을 것 같아요. 선생님의 시선을 받으니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긴 했어요.
고 : 대학에 가서 역사의 어떤 분야를 공부하고 싶었어요?
명 : 친구들이 제가 역사와 관련해서 얘기할 때는 갑자기 열정적으로 변하니까 ‘너는 이 분야로 상위권 대학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떠냐?’고도 했어요. 그런데 그때는 제가 입시랑 연결지어서 무언가를 찾아보고 공부하고 기록하는 걸 좀 귀찮아했어요. 제가 관심이 가면 자연스럽게 끝까지 검색해 보는데, 어느 대학이랑 무슨 학과를 목표로 잡고 공부하는 것은 관심도 없었어요. 지금은 서양사나 세계사를 더 폭넓게 알아보고 싶어요. 한국사도 중요하지만 우선 세계의 큰 변화나 흐름을 공부하고 싶어요. 정치도 관심이 많고 국제 정세도 궁금한 점이 많아요. 더 구체적인 주제는 대학에 가면 정해질 것 같아요.
살기 싫었을 때, 저를 일으킨 건
고 : 성적이나 입시 문제로 부모님과 갈등 상황을 겪기도 했나요?
명 : 아까 말한 것처럼 고1 때 방황하면서 공부를 안했어요. 부모님은 성적표보다는 제가 새로운 고등학교 적응하지 못하는 걸 보고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때 저는 그냥 만사가 귀찮고 혼자 있고 싶었고 무기력했거든요. 고1, 4~5월이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어요. 부모님과 갈등도 하고 스트레스 상황이었어요.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그냥 살기가 싫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를 일으킨 것은 종종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혼자 다녀왔던 경험이에요.
고 :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갔었군요. 주로 다닌 곳은 어디고 무엇을 보며 힘을 얻었어요?
명 : 제가 아주 좋아하는 일이에요. 역사를 파고들다 보니까 유물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서울까지 갔어요. 시골에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서울까지 가야죠. 자주 갔어요. 국립중앙박물관이나 현대미술관,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도 혼자 다녔어요. 중2 때는 할머니랑 가기도 했지만 그 후로는 혼자 가서 며칠 동안 친척 집에 가서 있다가 오기도 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국 청나라 특별전시관, 그리스·로마실 상설전시관을 둘러볼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왔어요. 우리나라 전시관도 좋아했어요. 구한말~조선시대보다 고려를 비롯한 중세, 그 전 고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관심이 많이 가요. 그 오랜 시간을 견디고 버텨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거든요. 혼자 가면 한나절이나 하루 종일도 있어요. 간송미술관 혹시 가보셨어요? 무료인데 시대별 미술품 전시를 해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에요. 대구 간송미술관도 가보려고요.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역사에 파고들었던 것도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역사 속 인물이나 유물을 보는 시간은 ‘삶이 이어진다’는 느낌과 함께 힘들었던 저에게 뭔지 모를 삶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어요. 그래서 저는 역사에 대한 애정이 깊어요. 어찌 보면 저를 살게 한 과목이잖아요.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한국사능력 검정시험 1급도 땄어요.
고 : 와, 중1이 1급 따기 쉽지 않은데 정말 역사 덕후였군요.
명 : 네. 그때 시험감독 선생님도 놀라셨고, 친구들도 놀라워했어요(웃음).
고 : 친구들이 명준 님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뭐라고 할 것 같아요?
명 : 역사를 좋아하고 역사 얘기할 때는 눈빛이 살아나는 인간? 읽은 책의 배경지식이 생각보다 많은 친구. 몸이 가벼워서 균형을 잘 잡는 아이(웃음).
고 : 그렇구나. 명준 님, 이야기를 참 잘하네요.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세요?
명 : 네. 어떤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거나 내 생각을 피력하거나, 토론하는 걸 좋아해요. 역사 말고도 최근에 읽었던 책과 관련해서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최근 12.3 내란 사태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망했구나 걱정하기도 했지만 시민의식이 높아서 앞으로 잘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정치 얘기도 즐기고, 미국, 중국, 일본 등 국제 정세를 알아보는 것도 좋아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을 때는 부모님이 규제도 하셨어요. 밥 먹을 때 입만 열면 역사 얘기가 계속 나오니까 이제 좀 그만 하라고, 하하하!
부모님은 사학과가 배고픈 학문이라 말하시면서
고 :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잘 알아요? 엄마가 지역등대모임의 등대장으로 활동하는 거 보면서 평소에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명 : 엄마랑 회원MT 따라가서 애들이랑 놀았던 기억나요. 중2 이후에는 여자애들이랑 만나는 게 쑥쓰러워서 안 따라갔지만요. 엄마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분이세요. 지금은 상담자격증을 준비하고 계세요. 저는 엄마를 보면 나이랑 상관없이 진로는 계속해서 자신이 찾아가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엄마는 책을 정말 좋아하고 많이 읽으세요. 집에 책이 아주아주 많아요. 책이 집이에요(웃음).
엄마는 상담 쪽 책을 주로 보시고, 아빠는 물리학이나 수학, 역사, 철학 등 아주 다양하게 보세요. 그래서 최근에도 제가 엄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을 사드렸어요.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거든요. 엄마가 이제 동생들까지 졸업시키고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다 하신 말을 우연히 듣고, 사드렸어요. 받으시고 정말 좋아하셨어요. 책 보면서 좋은 장소를 실제로 알아봐야겠다고 하시면서.
고 : 그래요? 명준 님은 엄마한테 책도 선물하는 아들이구나. 이 자리를 빌어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을 해보실래요?
명 : 우리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에 비해 제 일상과 생각을 존중해 주시는 게 좋아요. 그래서 감사드려요. 역사학과가 취업을 생각하면 배고픈 학문이라고 하시면서도 끝까지 지지해 주셨어요. 만약 졸업 후에 취업하기 유망한 과를 골라서 상경계열이나 이공계열로 저를 몰아세우면서 공부하라고 다그쳤다면 저는 못 견뎠을 거예요. 초등학교 때는 수학도 엄청 강조하셨던 것 같긴 한데 제가 좋아하는 분야로 가도록 지원해 주셨어요. 그런 부분이 참 감사해요.
제가 역사를 전공하지만 역사는 제 뿌리로 삼고 다른 분야에서 일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최근에는 생물 분류학이나 적정 기술, 생체 모방 기술에도 관심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앞으로는 직장도 투 잡, 쓰리 잡 뛰는 시대가 되었고요. 무엇보다 제가 하고 싶은 분야를 잘 찾아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고 : 명준 님은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를 확실히 찾아서 도전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면서 힘든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간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갖든지 올곧은 역사의식을 갖겠다는 명준 님을 응원하겠습니다.
명 : 저도 감사합니다.
명준 님은 자신의 적성을 충분히 고려해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분야에 지원하고 성공까지 한 ‘성장진학’의 좋은 사례다. 명준 님이 꿈꾸는 방향을 함께 바라 보면서 그의 속도를 충분히 존중한 지혜로운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셨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15년 회원, 전인선 선생님의 가족 모두가 자녀들의 성장을 통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길 기도한다.
■ 글 : 노워리기자단 고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