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수일’. 이 이름을 알거나 들어 본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수포자’의 보호자이거나 초중등 교육계에서 일하는 사람. 구글에 ‘최수일’이라고 검색하면 수학교육가, 작가(공저 포함 무려 113건), 혁신교육이 키워드로 나온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3시간 동안 만난 최수일 선생님은 교육가나 작가가 아니라 ‘활동가’였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인! 최수일 선생님이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활동가인지 함께 나누기 위해 가장 중요한 내용만 정리해보았다.
박종찬(이하 박) : 선생님 이력을 정리한 자료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통해 읽어 보았습니다. 군 제대 후 부임한 중학교 첫 수업에서 70명의 집중된 눈에 반해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게 되셨다고요. 수학 교사로서 정체성 변화를 10년 단위로 정리하셨던데, 조금 더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최수일(이하 최) : 저는 고등학생일 때도 농사를 지었어요. 제가 고2일 때, 아버지는 농사짓는 형에게 저를 맡기고 본인은 서울로 가버리셨어요. 그러니, 제가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반드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녀야 하는 형편이었어요. 저희 아버지는 교과서 말고는 돈 없다고 참고서도 안 사주시는 분이었어요. 등록금이 제일 싼 대학교에 가야 하니 선택지가 서울대학교밖에 없었어요. 교사라는 꿈도 없었는데, 붙을 만한 학과가 사범대학이길래 선택한 거예요. 그래도 수학교육과는 제가 골랐어요.(웃음) 그리고 첫 부임지에서 저를 쳐다보는 아이들 눈빛에 반해서 ‘그래, 교사로 살아야겠다.’하고 결심하게 되었죠.
교사로서 ‘나의 삶을 제대로 산다’고 생각한 건 2004년, 그러니까 40대 중반쯤 되었을 때예요. 10년 단위로 나눴을 때 세 번째 시기죠. 부임하고 첫 10년 동안은 일상과 수학을 연결하는 수업을 위해 애 썼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한계에 다다랐어요. 두 번째 10년은 좋은교사운동과 같은 1세대 교육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는 시기였어요.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던 수학교사를 모아 (사)전국수학교사모임을 만들고 학교 현장의 변화도 만들어 보았죠. 하지만 나라 전체로 보았을 땐, 학생들의 수학에 대한 흥미는 더 떨어졌고 이른바 ‘수포자’도 증가하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때 굉장히 힘들었어요.
박 : 어떤 점이 그렇게 힘드셨나요?
최 : 수학 교사는 수학 성적을 좋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이 논리적이며 수학적으로 풍부한 생각을 갖도록 성장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학생들이 “수학은 정말 가치 있는 과목이에요, 내 인생에 필요한 공부예요, 수학을 배워서 내 삶에 도움이 되었어요.”라고 말하길 바랐어요. 그래서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느라 집에도 제대로 못 가고, 교사들을 독려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그 10년을 결산해 보니 당장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수학을 싫어하고 선생님도 힘들어하고, 변화는커녕 더 열악해지더라고요. ‘내가 교사로서 가치가 없구나. 직업을 바꿔야 되겠다.’ 생각하고 다른 일을 알아봤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휴직을 했어요.

박 : 세 번째 10년이 시작되는 시기였네요. 휴직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어떤 휴직을 하셨나요?
최 : 처음 1년은 연수 휴직을 신청해서 대학원에 입학을 했어요. 쉬러 간 거죠. 그런데 제가 수업 혁신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지도교수님이 같이 대학원 다니는 선생님 중 한 분에게 공개 수업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형식적인 공개 수업이 아니라, “이 부분에서 발문은 왜 이렇게 하셨어요?” “이 수업 자료를 이때 왜 투입하셨어요?”처럼 아주 세세한 질문을 받게 하는 공개 수업이었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함께 공부하던 10명의 대학원생들이 수업 녹취본을 나눠 맡았더니, 전사록은 1시간만에 나왔어요. 그런데 그 수업을 한 줄 한 줄 분석하는데 3개월이 걸렸어요. 혼자 참관했다면 아이들 반응을 전부 체크하지 못했을 텐데, 9명의 대학원생들이 아이들 반응을 옆에서 보고 기록해서 다 분석한 거예요. 정말 많은 데이터, 수업에 참여한 아이들이 보여주는 수백 가지 말과 생각이 그 안에 있는 걸 깨달았어요. 그 작업을 통해 제가 크게 깨졌어요. 교사인 내가 주도적으로 수업을 끌고 가는구나, 아이들이 수학을 힘들어하는 원인을 그때 깨달았어요.
3년 휴직 동안 수업을 분석하며 얻은 것들
박 : 그 후에 다시 휴직을 하셨죠?
최 : 네, 그런 방식으로 계속 수업을 분석하려고 연수 휴직을 2년 연장했죠. 수업을 아주 세세하게 분석하면서 제 수업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연수 휴직 3년 중 2년 차부터 공개 수업을 매주 했어요.
박 : 휴직 중에 공개 수업을 어떻게 하실 수 있죠?
최 : 근무하던 학교에 부탁을 했어요. 인근 중학생을 대상으로 방과후에 수학 수업을 하고 싶다고. 학교로서는 다른 학교 중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공부하러 온다고 하면 좋은 홍보가 되잖아요. 인근 중학교에 공문을 보내서 학생들을 한 20명 모집했어요. 수업을 분석할 선생님들도 모집했고요. 오후 4시에서 5시까지 한 시간 수업하고, 애들 보내면 그때부터 저녁 늦게까지 선생님들이 수업에 대해 분석한 얘기를 주고 받고요. 사전에 신청하지 않아도 좋지만 어쨌든 수업을 보러 왔으면 그냥은 못 간다. 저녁 늦게까지 얘기를 해야 된다. 이런 전제로 오라고 하니까 그걸 토대로 팀이 만들어졌어요.

박 : 자기 수업 연구에 목마른 분들이 주로 찾아오셨겠어요.
최 : 그때는 한 3년차, 5년차 되는 젊은 선생님들이 본인의 수업이 너무 힘드니까 그걸 해결하러 온거죠. 그분들은 20년이 넘도록 지금도 계속 그 팀 활동을 하고 있어요. 매주 하고 주말에도 모여서 수업 이야기, 방학 때도 몇 박 며칠 모여서 해요. 복직할 때까지 그렇게 2년 간 방과후 수업을 공개하면서 내 수업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는 다른 혁신학교 선생님들 컨설팅을 다녔어요. 이우중고등학교, 서울 한울중학교 등 수도권에서만 30여 개 혁신학교에 다녔죠. 제가 말하는 혁신은 진짜로 아이들이 학교에서‘만’ 공부하는 거예요. 방과 후에 하는 수업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럼 교육과정을 바꿔야지. 방과 후라는 건 교육과정이 아니잖아요. 국가에서 정한 수업 일수 안에 완성된 것으로 성장을 해야지, 방과 후에 보충 수업을 해야 된다면 부족한 교육과정을 만든 거예요.
박 : ‘보충 수업이 필요하다면 교육과정이 부족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접근은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최 : 지금의 학교 수업만으로 100점 받는 학생을 만들라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안 되잖아요. 100점 받은 애한테 학교 선생님한테만 배웠니? 하고 물어보면 아니잖아요. 학원이 가르친 거죠. 그런데 이런 애들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집에 수학 교과서도, 문제집도 안 가져가고 학원도 안 다녔어요. 학교 끝나면 운동장이 바글바글해요. 뛰어놀고 하느라고요. 그런데 단원 평가를 받으면 애들이 다 100점을 받아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죠?
박 : (잠시 생각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최 : 이런 학교가 <수학 공부 걱정 없는 학교>예요. 지금은 불가능하죠. 그래서 그런 학교가 가능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지금 제가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수학 공부 걱정 없는 마을(이하 ‘수학마을’)>입니다.
학교수업만으로 100점 맞을 수 있을까?
박 : '수학마을'에 대해서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보내준 자료를 통해 조금 살펴보았는데요, 교육 소외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일 거라 예상했는데 대구 수성구나 경기 남양주 별내 등 일반적인 지역이더라고요. 좀더 자세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최 :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처음 제가 수학마을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지방의 인구소멸과 폐교 문제였어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어요. 내년에 신입생이 없어요. 고향에서 농사 짓는 제 형이 “야, 네가 다녔던 초등학교부터 살려야지, 왜 혁신학교 같은 다른 학교 살리고 그러냐.”라는 말에 제가 미안하다 싶어서 전북 김제시부터 전남 순천, 경남 남해 이렇게 다녀 봤어요. 가서 보니 ‘작은 학교 살리기 사업’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그거랑 수학마을을 같이 해보려고 했는데, 막상 부딪쳐보니 다른 문제가 있었어요.

박 : 어떤 문제인가요?
최 : 거기 사시는 부모님들, 그러니까 농촌이 너무 바빠요. 작은 마을일수록 각자 하는 일이 많더라고요. 수학마을을 운영하려면 아이들을 맡아서 수학을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주민들도 만나고 작은 학교 살리기 담당자도 만나고, 지역에 있는 풀뿌리 활동가들까지 열심히 만났어요. 한 번 내려가면 1박 2일씩 꼭 있으면서, 몇 달을 노력해봤는데 결국 안되더라고요. 형에게 “나, 고향에 대한 의리는 지켰다.”라고 했죠.(웃음) 노력했던 곳에서 다 안 되니까 굉장히 허무함에 빠졌는데, 대구 중구에 있는 성내 2동에서 연락이 먼저 왔어요. 수학마을을 우리와 같이 하면 안되겠냐 하고요.
박 : 대구라면 대도시인데, 거기에도 교육 소외 지역이 있을까요?
최 : 서울도 ‘중구’를 생각해보면 학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린 자녀가 있는 젊은 부부가 선뜻 들어 올 수 있는 지역이 아니잖아요? 아파트 가격도 비싸고요. 대구도 중구의 초등학교 학생 수를 보면 굉장히 적어요. (대구 중구의 초등학교 9개 중 5개 초등학교가 한 학년당 100명이 넘지 않았다. 동인초등학교의 경우 1학년이 19명. [출처]학교알리미)
대구 중구 성내동에 있는 분이 제 사업계획을 어디선가 듣고 제가 오고 가는 비용 전부 다 지원하고, 활동가 양성 비용도 지원하겠다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거기부터 시작해서 좀더 찾아보다 만난 곳이 충북 옥천과 경기 남양주 별내였어요.
박 : 남양주는 별내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저에게는 익숙한데요, 수도권 중에서도 서울에 가까운 곳 아닌가요?
최 : 가깝죠. 사교육으로 유명한 중계동 은행 사거리도 가깝고요. 어지간하면 그쪽 사교육시장으로 보낼텐데, 이 신도시 안에서도 독특한 공동체가 있어서 수학마을을 운영할 수 있었어요. LH에서 실험적으로 시도한 임대아파트(협동조합형 공공 지원 민간주택 사업)예요. 입주민 대부분이 조합원인데, LH가 아니라 조합에서 임대권을 갖고 있어서 결속력이 남다르죠. 거기 아파트 내 도서관 규칙이 참 독특한데, 첫 번째가 ‘도서관에서 공부하지 마라’예요.
박 : 진짜 특이하네요.
최 : 여기서는 책만 읽어라. ‘연필 꺼내서 공부하지 마라.’하고 써 있어요. 문화가 완전히 다른 거죠. 보통 아파트에는 공부하라고 독서실도 운영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다른 문화, 좋은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중계동이 가까운 별내에서도 수학마을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어요.
대구 중구를 시작으로 충북 옥천과 남양주 별내를 동시에 진행하고, 네 번째로 대구의 시지마을을 만나게 되었어요. 시지마을은 수성구라고 대구에서도 사교육으로 유명한 곳에 속해 있는데, 그 마을에서 공동육아 조합을 만들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방과후에 강사 불러서 영어, 수학 공부를 시켰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초등 4학년이 되면 수성구에 가서 비싼 돈 내고 학원을 다니게 돼요. 그게 계속 갈등이었던 거죠. 그러던 중에 제가 추진하던 수학마을을 시지마을에 소개한 분이 계셨어요. 알고 보니 제 네이버 카페(최수일의 수학교육연구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신 분이더라고요. 제가 한 발짝을 말하면 벌써 열 발짝 앞서 뛰어가는, 정말 열정적인 분이셔요. 그런 분이 계시니 수학마을을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더라고요.

상처 받지 않는 수학공부를 위해
박 : 수학마을을 운영하려면 그런 열정적인 활동가분들이 꼭 필요하다는 말, 명심하겠습니다. 최수일 선생님의 수학 교수학습 방법이 수학 공부에 실패 경험이 쌓인 아이들을 위한 공부 방법이잖아요? 이런 것을 개발하시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있을까요?
최 : 선생님은 수학 공부 한다고 하면 어떤 게 떠오르세요? 애들이 뭘 할까요?
박 : 학교나 학원에서 수업 듣는 것이나, 집에서 문제집 푸는 것이요.(웃음)
최 : 문제집 속에는 개념이 없어요. 개념은 글이거든요. '수학마을'에 와서 문제집 풀이가 아니라 스스로 개념노트 정리를 하면, 상처받는 아이들이 없어요. 빠르든 느리든 개인차가 있겠지만, 창피할 일도 없어요. 노트 정리 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있고 「개념연결사전」을 찾아볼 수도 있겠죠. 근데 풀기 어려운 수학 문제는 물어보는 것도, 대답해주는 것도 어려워요. 풀기 힘들게 만들어놓은 수학 문제 때문에 상처가 생기는 거예요. 저는 그런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진짜 수학 공부라 생각하고, 초등학생 부모님과 중·고등생들에게 그 노트 정리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2022년에 낸 책이 「지금 공부하는 게 수학 맞습니까?」예요. 제가 가장 아끼는 책입니다.
그 책을 보고나서 성공한 구체적인 사례들도 있어요. 공부에 손 놓고 있다가 고등학교 진학 후에 꿈이 생겨서 제가 알려준 개념노트 정리하면서 육군사관학교에 간 친구 이야기도 있어요. 중학교 2학년 첫 수학 시험 3일 전에 기출 문제 풀어봤다가 60점 맞아서 완전 좌절했는데, 책에 나온 대로 3일 동안 정말 열심히 개념노트 정리만 해서 90점 맞은 친구도 있고요.
박 : 개념노트 정리만으로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받는 아이들이 없는 방법이라는 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최 : 선생님, 요즘에 한창 이슈인 AI 디지털 교과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 : (갑자기 질문을 받아 놀랐지만) 일단 실체가 없이 계획만 나와 있는 걸로 알고 있고요, 쓸데없는 곳에 예산 써서 논란이 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최 : 선생님이 저에게 보내주신 깨봉수학 유튜브 영상도 잘 보았어요.(필자는 인터뷰 전날 최수일 선생님에게 깨봉수학 유튜브 영상을 보내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았다.) 깨봉 수학이나 디지털 교과서 모두 ‘행동주의 교육철학’을 기반으로 해요. 교사 중심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깨봉수학은 교사가 설명하는 방식을 바꾼 것이고 디지털 교과서는 교사가 학생에게 제공하는 학습 수단을 종이에서 디지털 디바이스로 바꾼 것일 뿐이지 본질적인 성격은 행동주의예요. 학습자 주도적인 교육이 아니죠. 말은 맞춤형인데, 교사 맞춤형이지 학생 맞춤형이 아니예요. 학습자 개인의 특성은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문제를 제시하지만, 그 문제가 정말 그 학습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학습자들의 빅 데이터를 미리 수집하고 그 안에서 나온 평균적인 문제를 제공하는 거죠. 그러한 문제는 철저히 지금의 수능 체제에 맞춰져 있어요. 미래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경쟁을 전제로 하는 교육인 거죠.
아이들의 생각을 열어주는 질문은 AI가 할 수 없어요. 오직 선생님만이 할 수 있어요. 행동주의 교육철학에서 나온 교사 중심적 교과서나 깨봉수학은 그런 질문을 할 수 없어요. 그렇게 나온 문제나 교과서를 고치는 것도 AI가 할 수 없어요. 이것은 선생님의 고유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원고를 쓰는 지금도 우리 반 옆의 2학년 2반에서는 구구단 노래 부르기가 한창이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밝다. 이 아이들 중 누군가는 깨봉수학을 접해서 “구구단 외우면 수포자 된다고 했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아이들이 6학년이 되었을 때, 구구단 때문에 수포자가 되어 있을까? 학부모들은 여전히 중학수학 선행학습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며 사교육 걱정 많은 세상에 살고 있을까? 최수일 선생님의 열정이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내가 사는 동네, 더 나아가 대한민국 곳곳에 퍼져 더 이상 수학 문제 풀이하느라 상처받는 아이도, 수학 선행 학원 알아보느라 걱정하는 보호자도 없는 세상이 되길 꿈꾸어본다.
■ 글. 노워리기자단 박종찬
‘최수일’. 이 이름을 알거나 들어 본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수포자’의 보호자이거나 초중등 교육계에서 일하는 사람. 구글에 ‘최수일’이라고 검색하면 수학교육가, 작가(공저 포함 무려 113건), 혁신교육이 키워드로 나온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3시간 동안 만난 최수일 선생님은 교육가나 작가가 아니라 ‘활동가’였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인! 최수일 선생님이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활동가인지 함께 나누기 위해 가장 중요한 내용만 정리해보았다.
박종찬(이하 박) : 선생님 이력을 정리한 자료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통해 읽어 보았습니다. 군 제대 후 부임한 중학교 첫 수업에서 70명의 집중된 눈에 반해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게 되셨다고요. 수학 교사로서 정체성 변화를 10년 단위로 정리하셨던데, 조금 더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최수일(이하 최) : 저는 고등학생일 때도 농사를 지었어요. 제가 고2일 때, 아버지는 농사짓는 형에게 저를 맡기고 본인은 서울로 가버리셨어요. 그러니, 제가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반드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녀야 하는 형편이었어요. 저희 아버지는 교과서 말고는 돈 없다고 참고서도 안 사주시는 분이었어요. 등록금이 제일 싼 대학교에 가야 하니 선택지가 서울대학교밖에 없었어요. 교사라는 꿈도 없었는데, 붙을 만한 학과가 사범대학이길래 선택한 거예요. 그래도 수학교육과는 제가 골랐어요.(웃음) 그리고 첫 부임지에서 저를 쳐다보는 아이들 눈빛에 반해서 ‘그래, 교사로 살아야겠다.’하고 결심하게 되었죠.
교사로서 ‘나의 삶을 제대로 산다’고 생각한 건 2004년, 그러니까 40대 중반쯤 되었을 때예요. 10년 단위로 나눴을 때 세 번째 시기죠. 부임하고 첫 10년 동안은 일상과 수학을 연결하는 수업을 위해 애 썼지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한계에 다다랐어요. 두 번째 10년은 좋은교사운동과 같은 1세대 교육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는 시기였어요.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던 수학교사를 모아 (사)전국수학교사모임을 만들고 학교 현장의 변화도 만들어 보았죠. 하지만 나라 전체로 보았을 땐, 학생들의 수학에 대한 흥미는 더 떨어졌고 이른바 ‘수포자’도 증가하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때 굉장히 힘들었어요.
박 : 어떤 점이 그렇게 힘드셨나요?
최 : 수학 교사는 수학 성적을 좋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이 논리적이며 수학적으로 풍부한 생각을 갖도록 성장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학생들이 “수학은 정말 가치 있는 과목이에요, 내 인생에 필요한 공부예요, 수학을 배워서 내 삶에 도움이 되었어요.”라고 말하길 바랐어요. 그래서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느라 집에도 제대로 못 가고, 교사들을 독려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그 10년을 결산해 보니 당장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수학을 싫어하고 선생님도 힘들어하고, 변화는커녕 더 열악해지더라고요. ‘내가 교사로서 가치가 없구나. 직업을 바꿔야 되겠다.’ 생각하고 다른 일을 알아봤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휴직을 했어요.
박 : 세 번째 10년이 시작되는 시기였네요. 휴직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어떤 휴직을 하셨나요?
최 : 처음 1년은 연수 휴직을 신청해서 대학원에 입학을 했어요. 쉬러 간 거죠. 그런데 제가 수업 혁신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지도교수님이 같이 대학원 다니는 선생님 중 한 분에게 공개 수업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형식적인 공개 수업이 아니라, “이 부분에서 발문은 왜 이렇게 하셨어요?” “이 수업 자료를 이때 왜 투입하셨어요?”처럼 아주 세세한 질문을 받게 하는 공개 수업이었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함께 공부하던 10명의 대학원생들이 수업 녹취본을 나눠 맡았더니, 전사록은 1시간만에 나왔어요. 그런데 그 수업을 한 줄 한 줄 분석하는데 3개월이 걸렸어요. 혼자 참관했다면 아이들 반응을 전부 체크하지 못했을 텐데, 9명의 대학원생들이 아이들 반응을 옆에서 보고 기록해서 다 분석한 거예요. 정말 많은 데이터, 수업에 참여한 아이들이 보여주는 수백 가지 말과 생각이 그 안에 있는 걸 깨달았어요. 그 작업을 통해 제가 크게 깨졌어요. 교사인 내가 주도적으로 수업을 끌고 가는구나, 아이들이 수학을 힘들어하는 원인을 그때 깨달았어요.
3년 휴직 동안 수업을 분석하며 얻은 것들
박 : 그 후에 다시 휴직을 하셨죠?
최 : 네, 그런 방식으로 계속 수업을 분석하려고 연수 휴직을 2년 연장했죠. 수업을 아주 세세하게 분석하면서 제 수업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연수 휴직 3년 중 2년 차부터 공개 수업을 매주 했어요.
박 : 휴직 중에 공개 수업을 어떻게 하실 수 있죠?
최 : 근무하던 학교에 부탁을 했어요. 인근 중학생을 대상으로 방과후에 수학 수업을 하고 싶다고. 학교로서는 다른 학교 중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공부하러 온다고 하면 좋은 홍보가 되잖아요. 인근 중학교에 공문을 보내서 학생들을 한 20명 모집했어요. 수업을 분석할 선생님들도 모집했고요. 오후 4시에서 5시까지 한 시간 수업하고, 애들 보내면 그때부터 저녁 늦게까지 선생님들이 수업에 대해 분석한 얘기를 주고 받고요. 사전에 신청하지 않아도 좋지만 어쨌든 수업을 보러 왔으면 그냥은 못 간다. 저녁 늦게까지 얘기를 해야 된다. 이런 전제로 오라고 하니까 그걸 토대로 팀이 만들어졌어요.
박 : 자기 수업 연구에 목마른 분들이 주로 찾아오셨겠어요.
최 : 그때는 한 3년차, 5년차 되는 젊은 선생님들이 본인의 수업이 너무 힘드니까 그걸 해결하러 온거죠. 그분들은 20년이 넘도록 지금도 계속 그 팀 활동을 하고 있어요. 매주 하고 주말에도 모여서 수업 이야기, 방학 때도 몇 박 며칠 모여서 해요. 복직할 때까지 그렇게 2년 간 방과후 수업을 공개하면서 내 수업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는 다른 혁신학교 선생님들 컨설팅을 다녔어요. 이우중고등학교, 서울 한울중학교 등 수도권에서만 30여 개 혁신학교에 다녔죠. 제가 말하는 혁신은 진짜로 아이들이 학교에서‘만’ 공부하는 거예요. 방과 후에 하는 수업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럼 교육과정을 바꿔야지. 방과 후라는 건 교육과정이 아니잖아요. 국가에서 정한 수업 일수 안에 완성된 것으로 성장을 해야지, 방과 후에 보충 수업을 해야 된다면 부족한 교육과정을 만든 거예요.
박 : ‘보충 수업이 필요하다면 교육과정이 부족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접근은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최 : 지금의 학교 수업만으로 100점 받는 학생을 만들라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안 되잖아요. 100점 받은 애한테 학교 선생님한테만 배웠니? 하고 물어보면 아니잖아요. 학원이 가르친 거죠. 그런데 이런 애들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집에 수학 교과서도, 문제집도 안 가져가고 학원도 안 다녔어요. 학교 끝나면 운동장이 바글바글해요. 뛰어놀고 하느라고요. 그런데 단원 평가를 받으면 애들이 다 100점을 받아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죠?
박 : (잠시 생각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최 : 이런 학교가 <수학 공부 걱정 없는 학교>예요. 지금은 불가능하죠. 그래서 그런 학교가 가능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지금 제가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수학 공부 걱정 없는 마을(이하 ‘수학마을’)>입니다.
학교수업만으로 100점 맞을 수 있을까?
박 : '수학마을'에 대해서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보내준 자료를 통해 조금 살펴보았는데요, 교육 소외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일 거라 예상했는데 대구 수성구나 경기 남양주 별내 등 일반적인 지역이더라고요. 좀더 자세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최 :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처음 제가 수학마을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지방의 인구소멸과 폐교 문제였어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어요. 내년에 신입생이 없어요. 고향에서 농사 짓는 제 형이 “야, 네가 다녔던 초등학교부터 살려야지, 왜 혁신학교 같은 다른 학교 살리고 그러냐.”라는 말에 제가 미안하다 싶어서 전북 김제시부터 전남 순천, 경남 남해 이렇게 다녀 봤어요. 가서 보니 ‘작은 학교 살리기 사업’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그거랑 수학마을을 같이 해보려고 했는데, 막상 부딪쳐보니 다른 문제가 있었어요.
박 : 어떤 문제인가요?
최 : 거기 사시는 부모님들, 그러니까 농촌이 너무 바빠요. 작은 마을일수록 각자 하는 일이 많더라고요. 수학마을을 운영하려면 아이들을 맡아서 수학을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주민들도 만나고 작은 학교 살리기 담당자도 만나고, 지역에 있는 풀뿌리 활동가들까지 열심히 만났어요. 한 번 내려가면 1박 2일씩 꼭 있으면서, 몇 달을 노력해봤는데 결국 안되더라고요. 형에게 “나, 고향에 대한 의리는 지켰다.”라고 했죠.(웃음) 노력했던 곳에서 다 안 되니까 굉장히 허무함에 빠졌는데, 대구 중구에 있는 성내 2동에서 연락이 먼저 왔어요. 수학마을을 우리와 같이 하면 안되겠냐 하고요.
박 : 대구라면 대도시인데, 거기에도 교육 소외 지역이 있을까요?
최 : 서울도 ‘중구’를 생각해보면 학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린 자녀가 있는 젊은 부부가 선뜻 들어 올 수 있는 지역이 아니잖아요? 아파트 가격도 비싸고요. 대구도 중구의 초등학교 학생 수를 보면 굉장히 적어요. (대구 중구의 초등학교 9개 중 5개 초등학교가 한 학년당 100명이 넘지 않았다. 동인초등학교의 경우 1학년이 19명. [출처]학교알리미)
대구 중구 성내동에 있는 분이 제 사업계획을 어디선가 듣고 제가 오고 가는 비용 전부 다 지원하고, 활동가 양성 비용도 지원하겠다 해서 시작하게 됐어요. 거기부터 시작해서 좀더 찾아보다 만난 곳이 충북 옥천과 경기 남양주 별내였어요.
박 : 남양주는 별내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저에게는 익숙한데요, 수도권 중에서도 서울에 가까운 곳 아닌가요?
최 : 가깝죠. 사교육으로 유명한 중계동 은행 사거리도 가깝고요. 어지간하면 그쪽 사교육시장으로 보낼텐데, 이 신도시 안에서도 독특한 공동체가 있어서 수학마을을 운영할 수 있었어요. LH에서 실험적으로 시도한 임대아파트(협동조합형 공공 지원 민간주택 사업)예요. 입주민 대부분이 조합원인데, LH가 아니라 조합에서 임대권을 갖고 있어서 결속력이 남다르죠. 거기 아파트 내 도서관 규칙이 참 독특한데, 첫 번째가 ‘도서관에서 공부하지 마라’예요.
박 : 진짜 특이하네요.
최 : 여기서는 책만 읽어라. ‘연필 꺼내서 공부하지 마라.’하고 써 있어요. 문화가 완전히 다른 거죠. 보통 아파트에는 공부하라고 독서실도 운영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다른 문화, 좋은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중계동이 가까운 별내에서도 수학마을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어요.
대구 중구를 시작으로 충북 옥천과 남양주 별내를 동시에 진행하고, 네 번째로 대구의 시지마을을 만나게 되었어요. 시지마을은 수성구라고 대구에서도 사교육으로 유명한 곳에 속해 있는데, 그 마을에서 공동육아 조합을 만들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방과후에 강사 불러서 영어, 수학 공부를 시켰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초등 4학년이 되면 수성구에 가서 비싼 돈 내고 학원을 다니게 돼요. 그게 계속 갈등이었던 거죠. 그러던 중에 제가 추진하던 수학마을을 시지마을에 소개한 분이 계셨어요. 알고 보니 제 네이버 카페(최수일의 수학교육연구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신 분이더라고요. 제가 한 발짝을 말하면 벌써 열 발짝 앞서 뛰어가는, 정말 열정적인 분이셔요. 그런 분이 계시니 수학마을을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더라고요.
상처 받지 않는 수학공부를 위해
박 : 수학마을을 운영하려면 그런 열정적인 활동가분들이 꼭 필요하다는 말, 명심하겠습니다. 최수일 선생님의 수학 교수학습 방법이 수학 공부에 실패 경험이 쌓인 아이들을 위한 공부 방법이잖아요? 이런 것을 개발하시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있을까요?
최 : 선생님은 수학 공부 한다고 하면 어떤 게 떠오르세요? 애들이 뭘 할까요?
박 : 학교나 학원에서 수업 듣는 것이나, 집에서 문제집 푸는 것이요.(웃음)
최 : 문제집 속에는 개념이 없어요. 개념은 글이거든요. '수학마을'에 와서 문제집 풀이가 아니라 스스로 개념노트 정리를 하면, 상처받는 아이들이 없어요. 빠르든 느리든 개인차가 있겠지만, 창피할 일도 없어요. 노트 정리 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있고 「개념연결사전」을 찾아볼 수도 있겠죠. 근데 풀기 어려운 수학 문제는 물어보는 것도, 대답해주는 것도 어려워요. 풀기 힘들게 만들어놓은 수학 문제 때문에 상처가 생기는 거예요. 저는 그런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진짜 수학 공부라 생각하고, 초등학생 부모님과 중·고등생들에게 그 노트 정리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2022년에 낸 책이 「지금 공부하는 게 수학 맞습니까?」예요. 제가 가장 아끼는 책입니다.
그 책을 보고나서 성공한 구체적인 사례들도 있어요. 공부에 손 놓고 있다가 고등학교 진학 후에 꿈이 생겨서 제가 알려준 개념노트 정리하면서 육군사관학교에 간 친구 이야기도 있어요. 중학교 2학년 첫 수학 시험 3일 전에 기출 문제 풀어봤다가 60점 맞아서 완전 좌절했는데, 책에 나온 대로 3일 동안 정말 열심히 개념노트 정리만 해서 90점 맞은 친구도 있고요.
박 : 개념노트 정리만으로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받는 아이들이 없는 방법이라는 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최 : 선생님, 요즘에 한창 이슈인 AI 디지털 교과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 : (갑자기 질문을 받아 놀랐지만) 일단 실체가 없이 계획만 나와 있는 걸로 알고 있고요, 쓸데없는 곳에 예산 써서 논란이 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최 : 선생님이 저에게 보내주신 깨봉수학 유튜브 영상도 잘 보았어요.(필자는 인터뷰 전날 최수일 선생님에게 깨봉수학 유튜브 영상을 보내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았다.) 깨봉 수학이나 디지털 교과서 모두 ‘행동주의 교육철학’을 기반으로 해요. 교사 중심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깨봉수학은 교사가 설명하는 방식을 바꾼 것이고 디지털 교과서는 교사가 학생에게 제공하는 학습 수단을 종이에서 디지털 디바이스로 바꾼 것일 뿐이지 본질적인 성격은 행동주의예요. 학습자 주도적인 교육이 아니죠. 말은 맞춤형인데, 교사 맞춤형이지 학생 맞춤형이 아니예요. 학습자 개인의 특성은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문제를 제시하지만, 그 문제가 정말 그 학습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학습자들의 빅 데이터를 미리 수집하고 그 안에서 나온 평균적인 문제를 제공하는 거죠. 그러한 문제는 철저히 지금의 수능 체제에 맞춰져 있어요. 미래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경쟁을 전제로 하는 교육인 거죠.
아이들의 생각을 열어주는 질문은 AI가 할 수 없어요. 오직 선생님만이 할 수 있어요. 행동주의 교육철학에서 나온 교사 중심적 교과서나 깨봉수학은 그런 질문을 할 수 없어요. 그렇게 나온 문제나 교과서를 고치는 것도 AI가 할 수 없어요. 이것은 선생님의 고유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원고를 쓰는 지금도 우리 반 옆의 2학년 2반에서는 구구단 노래 부르기가 한창이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밝다. 이 아이들 중 누군가는 깨봉수학을 접해서 “구구단 외우면 수포자 된다고 했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아이들이 6학년이 되었을 때, 구구단 때문에 수포자가 되어 있을까? 학부모들은 여전히 중학수학 선행학습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며 사교육 걱정 많은 세상에 살고 있을까? 최수일 선생님의 열정이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내가 사는 동네, 더 나아가 대한민국 곳곳에 퍼져 더 이상 수학 문제 풀이하느라 상처받는 아이도, 수학 선행 학원 알아보느라 걱정하는 보호자도 없는 세상이 되길 꿈꾸어본다.
■ 글. 노워리기자단 박종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