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뒷모습
내가 주 3일 근무를 시작하면서 가끔 출근하는 딸의 뒷모습을 보게 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불안하고 걱정 많던 시간이 떠올라 동지애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퇴근이 늦어지면 어김없이 ‘오늘은 외부 미팅으로 늦어요.’, ‘회의가 길어져 지금 출발해요!’처럼 걱정 많은 엄마를 배려하는 딸의 카톡이 울린다. 늦을 때는 연락하라는 요청을 하지 않아도 지나온 시간만큼 서로의 상황을 파악하고 입장을 고려하는 데 마음을 쓸 정도로 자란 것이다. 이렇게 딸은 성인이 되었고, 사회생활을 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가끔 궁금하다.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도 미리 걱정을 하고 불안감이 큰 기질을 타고났고, 결혼해 아이를 키우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신혼여행에서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를 꽤 길게 의논했을 정도였으니, 준비성이 있다고만 보기에는 좀 과하다는 느낌이다. 그날, 남편과 합의한 아이 교육관은 “가지는 쳐 주되 분재는 만들지 말자”였다. 합의할 당시에는 몰랐다. 이 교육관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 쉽지 기준을 세워야 했고, 어떤 가지를 잘라 내어야 하고, 자르는 시기는 언제여야 하며, 어떻게 잘라 내어야 분재가 되지 않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해야 했다. 우리 부부는 최고난도의 교육관을 설정한 것이다. |
저녁 8시 강북의 대치동
아이 교육에 대한 첫 번째 불안감은 예상보다 빨랐다.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퇴사를 결정하며 남편 직장 근처인 강북의 대치동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사한 날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이사해서 더 놀랐던 걸까? 이삿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동네를 둘러보다 저녁 8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도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가를 바쁘게 움직이는 초등 4학년 정도의 아이들을 본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 이사 잘못한 것 같아~’가 그 순간 내가 뱉은 말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교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이사 날 저녁 풍경은 충격이었고,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밤 시간의 학원가 불빛에 급속도로 불안감이 올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늦은 시간에 초등 아이들이 학원가로 들어가는 모습은 낯설기만 했고, 그 풍경 속에 유치원 입학을 앞둔 내 아이가 오버랩되어 그려졌다. 그때부터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았다. 한겨레신문 교육면에 소개된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등대지기학교 1기 분들의 인터뷰’를 만난 것은 나의 간절함에 대한 보답인가 싶어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렇게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
현실과의 간극
사교육걱정을 알게 되자 바로 등대지기학교를 수강했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자꾸 생기면서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부터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교육에 대한 열망은 자꾸만 커졌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있고, 나 혼자만의 꿈이 아님을 알게 되자 용기가 생겼다. 내성적이기만 했던 내가 각자의 지역에서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지역모임이 구성되자마자 바로 신청하고 참석했으니 보기 드문 용기였다. 지역모임은 ‘나’보다는 ‘우리’, ‘나만’이 아닌 ‘함께’라는 연대의 경험을 선물로 주었다. 비로소 나는 조금씩 성숙해졌다.
나에게 첫 강의였던 2기 등대지기학교의 2강 허아람 대표(인디고서원) 강의 마지막에 정세청세(‘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의 줄임말로 청소년들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인문 토론의 장)라는 청소년 활동을 소개했는데, 깜짝 놀랐다. 늘 꿈꿔 온 청소년 활동이라 중학생이 된 딸에게 소개하려고 같이 한 번 더 들었다. 그 강의에 소개된 정세청세 활동은 딸의 청소년 시기를 알차고 풍성하게 만들어 준 중요한 활동이 되었다. 매해 빠지지 않고, 항상 기대감을 가지고 들었던 등대지기학교 강의들은 부모로서뿐 아니라 시민이자 어른으로 성숙해지는 자양분이었다.
단체의 강의를 통해 교육에 대한 생각이 넓어지고 나만의 교육관이 자리 잡아 가는 중이었지만 나와 이이가 일상에서 부딪히며 불안해지는 순간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끔은 내 생각과 다른 현실과의 간극으로 혼란스럽기도 했고 학부모 모임에서 만나는 주변 엄마들의 한마디에 상처받고 자괴감과 불안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사교육걱정을 만난 후에는 불안과 걱정이 다시 커지면, 지역모임을 통해 위로와 지지를 받으며 흔들리던 마음을 추슬렀다. 그렇게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고민과 걱정 그리고 불안은 종종 커지기도 하고 가끔 낮아지기도 하며 반복되었다. |
중3 외고 진학 선언
딸은 전교 등수까지 나오는 시험 결과에 종종 좌절했고, 나는 시험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를 알아보는 용도이니 점수에 너무 속상해 말라며 괜찮다고 위로하곤 했다. 그러나 내 진심은 이렇게 좌절하다 포기하면 어쩌나 하는 앞선 걱정을 또 하고 있었다. 내 마음은 그대로 딸에게 전달되었고 엄마가 자신의 점수와 좌절하는 모습에 괜찮지 않음을 느꼈다. 딸이 겪는 속상한 그 순간에 원했던 것은 자신의 감정을 공감해 주는 것이었음을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잘 몰랐다.
딸은 중3 여름방학 직전, 외고로 진학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당시 외고는 준비 없이는 진학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학교에도 미리 신청을 했어야 했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당황해 설득해 보았으나 딸은 본인이 원하는 외고 진학을 위해 사전 조사와 선택의 근거까지 제시하며 우리를 설득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준비했으니, 그동안 사교육걱정의 강의를 들으며 아이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길 바랐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원하던 대로 자라고 있는 것 아닌가.
더구나 고교 진학 전 해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사교육을 부추기는 외고 입시 개선 운동을 했고, 외고 입시를 영어 내신만 반영, 토플 등 영어 인증 시험∙경시대회 성적은 배제하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 덕분에 미리 준비하지 않고도 원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니 딸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엄청난 혜택을 받은 것이다. 왕복 3시간이 걸리는 등하교의 힘겨움을 고등 3년 동안 힘든 내색 없이 열심히 다닌 것도 아이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
학업 부담을 딛고 나를 펼치다
원하던 외고 입학의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고 입학 전 주어지는 과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선행학습은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혼자 공부해 왔던 터라 아직 배우지도 않은 내용을 풀어야 하는 것에 난감했던 것 같다. 딸의 학습에 대한 부담감은 아마도 입학 때부터 시작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당시 나도 오랜 경력 단절을 끝내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상근을 하게 되었고 딸의 학습 부담감을 깊이 들여다볼 시간이 부족했기에 아이 혼자 오로지 겪었다.
무슨 일이든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밝은 면이 있듯 딸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다양한 교내외 활동으로 풀어냈다. 정세청세 활동도 계속했고, 다음재단의 유스보이스 캠프도 본인이 찾아서 2년 동안 참여했으며, 중간 또는 기말고사 후에는 각종 전시회를 다녔고, 학교 교지편집부 활동도 아주 열심히 했다. 친구들과 야간자율학습도 종종 빠지고 영화 보러 다니며 놀았던 딸은 고등학교 3년을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말한다. 모집 인원 부족으로 교내 ‘고전 읽기 모임’이 취소될 위기에 처하자 딸과 친구들은 담당 선생님을 설득해 최소 인원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몇 분의 선생님도 합류하는 책 모임을 하였으니, 그 추억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된다. |
전화기 너머, 너의 울음
다시 시작한 일로 정신이 없었는데도, 영화나 전시회, 노래방 같이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고 놀았던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이가 한 모든 활동을 꿰뚫고 있는 이유는 밤 11시가 되어 귀가하는(야간자율학습 끝나고 하교) 딸과 가끔 새벽 1시까지 긴 수다를 떨었기 때문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참여하는 활동은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이야기하던 그 시간은 딸도 나도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순간이었다.
바쁜 중에도 걱정과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후원회원에서 이제는 상근까지 하게 되니 교육에 대한 생각이 단단해졌다. 어느 날 불쑥 공부하기 힘들면 사교육이란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때 아이는 수학정석을 세 번 돌린 친구나 선행 안 한 자기나 수학 성적이 똑같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즐겁고 재미난 것을 하려면 공부 시간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수능 결과는 실패였다. 마침 딸의 수시 전형 접수 기간에 나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요한 수술을 받았다. 내 목숨에 집중하니 아이의 힘겨움과 스트레스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때도 아이 혼자 오롯이 견뎌내야 했다. 수술 회복 중에 아이는 수능을 치르고 수시 결과가 하나씩 나왔다. 마지막 수시 결과까지 불합격이 되었을 때 아이의 떨리는 울음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내가 옆에서 힘이 되기는커녕 갑자기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더 얹어 준 상황이 얼마나 미안하고 속상하던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울음을 삼켰다. |
드라마 기획 PD까지
역시나 모든 일에는 음과 양이 존재한다. 대입 실패 후 두 세 달 가까이 딸은 몸과 마음을 충분히 쉬면서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가진 듯했고, 남편과 나도 딸의 계획을 묻지 않았다. 외고 입학을 설득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자신의 의견을 조목조목 이야기 해 왔던 딸이라 언젠가 결심이 서면 말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딸의 계획을 물을 상황도 아닐 만큼 우리 가족에게 좋지 않은 큰 일이 있기도 했다.
딸은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고, 진로와 진학을 조금 수정했다. 수능을 보지 않고 본인이 관심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소수의 인원이 입학하는 곳이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조사해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그 기간 딸의 루틴은 단순했다. 버스 정거장 10개 정도의 거리를 매일 걸어 도서관에 도착해 책을 읽거나 자료를 찾고 필요한 공부를 했으며 다시 걸어서 귀가하거나 종종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다. 8개월의 시간은 아마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만 한다. 나 역시 2차 수술을 해야 했기에 이번에도 딸은 혼자 견뎠다.
최종 면접까지 마친 후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아이의 울음을 기억한다.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 얼마나 간절했을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간절함과 열망이 커서 그런지 딸은 학교의 수업에 만족해 했고, 자신과 너무도 잘 맞는다고 좋아했다. 딸은 장학금으로 일부의 학비를 마련하고, 그 외 학비와 용돈을 스스로 해결하며 대학 4년을 보냈다. 수업을 마치면 간단히 저녁을 먹고 아르바이트를 한 후 귀가하는 전철 안에서 노트북으로 작업하며 집에서 마무리하는 식으로 시간을 쪼개어 살며 졸업했다. 지금은 드라마 기획 PD를 하며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
좋은 어른들과 여기에
되돌아보면 고비고비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있었기에 현재의 나와 우리 가족이 존재한다. 중요한 순간과 어려운 고비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잡아 주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교육 고민을 시작할 무렵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되고, 매해 들었던 등대지기학교 강의를 통해 조금씩 성장했다. 아이 스스로 자기 삶의 첫 터닝포인트라고 이야기하는 정세청세 활동도 등대지기학교 강의를 통해 알게 되었고, 단체의 교육 운동 덕분에 외고 입학도 가능했다. 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교육에 대한 관점이 건강해져 걱정 많은 기질임에도 부모 역할의 중심을 단단히 잡을 수 있었다. 아이 교육에 대한 관점을 건강하게 세우니, 아이와의 관계도 훨씬 부드러워지고 여유가 생겼다. 그뿐인가. 그 단단함이 수술도 극복하게 했고, 당면한 어려움마저도 헤쳐 나갈 용기를 주었다. 함께 한 동료뿐 아니라 회원들까지 수술비를 후원하고 나의 회복을 기도해 주었으니, 지금의 모습으로 회복된 것은 모두 단체 덕분이다.
우리의 일상은 옛날 동화처럼 ‘그래서 ~~~ 잘 살았다고 해요’라고 마무리되지 않는다. 삶은 계속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또 고비를 만나게 된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었다고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만나는 고비는 상처도 남기지만 경험치도 남긴다. 그러니 지나온 고비마다 배우고 느낀 것으로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구나 다음 세대를 위해 교육의 변화를 꿈꾸고 노력하는 좋은 어른들이 있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있으니, 걱정할 게 없다. |
*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하고픈 선생님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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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 3일 근무를 시작하면서 가끔 출근하는 딸의 뒷모습을 보게 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불안하고 걱정 많던 시간이 떠올라 동지애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퇴근이 늦어지면 어김없이 ‘오늘은 외부 미팅으로 늦어요.’, ‘회의가 길어져 지금 출발해요!’처럼 걱정 많은 엄마를 배려하는 딸의 카톡이 울린다. 늦을 때는 연락하라는 요청을 하지 않아도 지나온 시간만큼 서로의 상황을 파악하고 입장을 고려하는 데 마음을 쓸 정도로 자란 것이다. 이렇게 딸은 성인이 되었고, 사회생활을 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가끔 궁금하다.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도 미리 걱정을 하고 불안감이 큰 기질을 타고났고, 결혼해 아이를 키우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신혼여행에서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를 꽤 길게 의논했을 정도였으니, 준비성이 있다고만 보기에는 좀 과하다는 느낌이다. 그날, 남편과 합의한 아이 교육관은 “가지는 쳐 주되 분재는 만들지 말자”였다. 합의할 당시에는 몰랐다. 이 교육관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 쉽지 기준을 세워야 했고, 어떤 가지를 잘라 내어야 하고, 자르는 시기는 언제여야 하며, 어떻게 잘라 내어야 분재가 되지 않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해야 했다. 우리 부부는 최고난도의 교육관을 설정한 것이다.
아이 교육에 대한 첫 번째 불안감은 예상보다 빨랐다.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퇴사를 결정하며 남편 직장 근처인 강북의 대치동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사한 날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이사해서 더 놀랐던 걸까? 이삿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동네를 둘러보다 저녁 8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도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가를 바쁘게 움직이는 초등 4학년 정도의 아이들을 본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 이사 잘못한 것 같아~’가 그 순간 내가 뱉은 말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교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이사 날 저녁 풍경은 충격이었고,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밤 시간의 학원가 불빛에 급속도로 불안감이 올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늦은 시간에 초등 아이들이 학원가로 들어가는 모습은 낯설기만 했고, 그 풍경 속에 유치원 입학을 앞둔 내 아이가 오버랩되어 그려졌다. 그때부터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았다. 한겨레신문 교육면에 소개된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등대지기학교 1기 분들의 인터뷰’를 만난 것은 나의 간절함에 대한 보답인가 싶어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렇게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사교육걱정을 알게 되자 바로 등대지기학교를 수강했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자꾸 생기면서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부터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교육에 대한 열망은 자꾸만 커졌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있고, 나 혼자만의 꿈이 아님을 알게 되자 용기가 생겼다. 내성적이기만 했던 내가 각자의 지역에서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지역모임이 구성되자마자 바로 신청하고 참석했으니 보기 드문 용기였다. 지역모임은 ‘나’보다는 ‘우리’, ‘나만’이 아닌 ‘함께’라는 연대의 경험을 선물로 주었다. 비로소 나는 조금씩 성숙해졌다.
나에게 첫 강의였던 2기 등대지기학교의 2강 허아람 대표(인디고서원) 강의 마지막에 정세청세(‘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의 줄임말로 청소년들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인문 토론의 장)라는 청소년 활동을 소개했는데, 깜짝 놀랐다. 늘 꿈꿔 온 청소년 활동이라 중학생이 된 딸에게 소개하려고 같이 한 번 더 들었다. 그 강의에 소개된 정세청세 활동은 딸의 청소년 시기를 알차고 풍성하게 만들어 준 중요한 활동이 되었다. 매해 빠지지 않고, 항상 기대감을 가지고 들었던 등대지기학교 강의들은 부모로서뿐 아니라 시민이자 어른으로 성숙해지는 자양분이었다.
단체의 강의를 통해 교육에 대한 생각이 넓어지고 나만의 교육관이 자리 잡아 가는 중이었지만 나와 이이가 일상에서 부딪히며 불안해지는 순간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끔은 내 생각과 다른 현실과의 간극으로 혼란스럽기도 했고 학부모 모임에서 만나는 주변 엄마들의 한마디에 상처받고 자괴감과 불안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사교육걱정을 만난 후에는 불안과 걱정이 다시 커지면, 지역모임을 통해 위로와 지지를 받으며 흔들리던 마음을 추슬렀다. 그렇게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고민과 걱정 그리고 불안은 종종 커지기도 하고 가끔 낮아지기도 하며 반복되었다.
딸은 전교 등수까지 나오는 시험 결과에 종종 좌절했고, 나는 시험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를 알아보는 용도이니 점수에 너무 속상해 말라며 괜찮다고 위로하곤 했다. 그러나 내 진심은 이렇게 좌절하다 포기하면 어쩌나 하는 앞선 걱정을 또 하고 있었다. 내 마음은 그대로 딸에게 전달되었고 엄마가 자신의 점수와 좌절하는 모습에 괜찮지 않음을 느꼈다. 딸이 겪는 속상한 그 순간에 원했던 것은 자신의 감정을 공감해 주는 것이었음을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잘 몰랐다.
딸은 중3 여름방학 직전, 외고로 진학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당시 외고는 준비 없이는 진학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학교에도 미리 신청을 했어야 했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당황해 설득해 보았으나 딸은 본인이 원하는 외고 진학을 위해 사전 조사와 선택의 근거까지 제시하며 우리를 설득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준비했으니, 그동안 사교육걱정의 강의를 들으며 아이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길 바랐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원하던 대로 자라고 있는 것 아닌가.
더구나 고교 진학 전 해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사교육을 부추기는 외고 입시 개선 운동을 했고, 외고 입시를 영어 내신만 반영, 토플 등 영어 인증 시험∙경시대회 성적은 배제하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 덕분에 미리 준비하지 않고도 원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니 딸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엄청난 혜택을 받은 것이다. 왕복 3시간이 걸리는 등하교의 힘겨움을 고등 3년 동안 힘든 내색 없이 열심히 다닌 것도 아이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원하던 외고 입학의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고 입학 전 주어지는 과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선행학습은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혼자 공부해 왔던 터라 아직 배우지도 않은 내용을 풀어야 하는 것에 난감했던 것 같다. 딸의 학습에 대한 부담감은 아마도 입학 때부터 시작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당시 나도 오랜 경력 단절을 끝내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상근을 하게 되었고 딸의 학습 부담감을 깊이 들여다볼 시간이 부족했기에 아이 혼자 오로지 겪었다.
무슨 일이든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밝은 면이 있듯 딸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다양한 교내외 활동으로 풀어냈다. 정세청세 활동도 계속했고, 다음재단의 유스보이스 캠프도 본인이 찾아서 2년 동안 참여했으며, 중간 또는 기말고사 후에는 각종 전시회를 다녔고, 학교 교지편집부 활동도 아주 열심히 했다. 친구들과 야간자율학습도 종종 빠지고 영화 보러 다니며 놀았던 딸은 고등학교 3년을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말한다. 모집 인원 부족으로 교내 ‘고전 읽기 모임’이 취소될 위기에 처하자 딸과 친구들은 담당 선생님을 설득해 최소 인원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몇 분의 선생님도 합류하는 책 모임을 하였으니, 그 추억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된다.
전화기 너머, 너의 울음
다시 시작한 일로 정신이 없었는데도, 영화나 전시회, 노래방 같이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고 놀았던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이가 한 모든 활동을 꿰뚫고 있는 이유는 밤 11시가 되어 귀가하는(야간자율학습 끝나고 하교) 딸과 가끔 새벽 1시까지 긴 수다를 떨었기 때문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참여하는 활동은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이야기하던 그 시간은 딸도 나도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순간이었다.
바쁜 중에도 걱정과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후원회원에서 이제는 상근까지 하게 되니 교육에 대한 생각이 단단해졌다. 어느 날 불쑥 공부하기 힘들면 사교육이란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때 아이는 수학정석을 세 번 돌린 친구나 선행 안 한 자기나 수학 성적이 똑같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즐겁고 재미난 것을 하려면 공부 시간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수능 결과는 실패였다. 마침 딸의 수시 전형 접수 기간에 나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요한 수술을 받았다. 내 목숨에 집중하니 아이의 힘겨움과 스트레스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때도 아이 혼자 오롯이 견뎌내야 했다. 수술 회복 중에 아이는 수능을 치르고 수시 결과가 하나씩 나왔다. 마지막 수시 결과까지 불합격이 되었을 때 아이의 떨리는 울음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내가 옆에서 힘이 되기는커녕 갑자기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더 얹어 준 상황이 얼마나 미안하고 속상하던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울음을 삼켰다.
드라마 기획 PD까지
역시나 모든 일에는 음과 양이 존재한다. 대입 실패 후 두 세 달 가까이 딸은 몸과 마음을 충분히 쉬면서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가진 듯했고, 남편과 나도 딸의 계획을 묻지 않았다. 외고 입학을 설득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자신의 의견을 조목조목 이야기 해 왔던 딸이라 언젠가 결심이 서면 말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딸의 계획을 물을 상황도 아닐 만큼 우리 가족에게 좋지 않은 큰 일이 있기도 했다.
딸은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고, 진로와 진학을 조금 수정했다. 수능을 보지 않고 본인이 관심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았고, 소수의 인원이 입학하는 곳이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조사해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그 기간 딸의 루틴은 단순했다. 버스 정거장 10개 정도의 거리를 매일 걸어 도서관에 도착해 책을 읽거나 자료를 찾고 필요한 공부를 했으며 다시 걸어서 귀가하거나 종종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다. 8개월의 시간은 아마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만 한다. 나 역시 2차 수술을 해야 했기에 이번에도 딸은 혼자 견뎠다.
최종 면접까지 마친 후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아이의 울음을 기억한다.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 얼마나 간절했을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간절함과 열망이 커서 그런지 딸은 학교의 수업에 만족해 했고, 자신과 너무도 잘 맞는다고 좋아했다. 딸은 장학금으로 일부의 학비를 마련하고, 그 외 학비와 용돈을 스스로 해결하며 대학 4년을 보냈다. 수업을 마치면 간단히 저녁을 먹고 아르바이트를 한 후 귀가하는 전철 안에서 노트북으로 작업하며 집에서 마무리하는 식으로 시간을 쪼개어 살며 졸업했다. 지금은 드라마 기획 PD를 하며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좋은 어른들과 여기에
되돌아보면 고비고비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있었기에 현재의 나와 우리 가족이 존재한다. 중요한 순간과 어려운 고비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잡아 주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교육 고민을 시작할 무렵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되고, 매해 들었던 등대지기학교 강의를 통해 조금씩 성장했다. 아이 스스로 자기 삶의 첫 터닝포인트라고 이야기하는 정세청세 활동도 등대지기학교 강의를 통해 알게 되었고, 단체의 교육 운동 덕분에 외고 입학도 가능했다. 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교육에 대한 관점이 건강해져 걱정 많은 기질임에도 부모 역할의 중심을 단단히 잡을 수 있었다. 아이 교육에 대한 관점을 건강하게 세우니, 아이와의 관계도 훨씬 부드러워지고 여유가 생겼다. 그뿐인가. 그 단단함이 수술도 극복하게 했고, 당면한 어려움마저도 헤쳐 나갈 용기를 주었다. 함께 한 동료뿐 아니라 회원들까지 수술비를 후원하고 나의 회복을 기도해 주었으니, 지금의 모습으로 회복된 것은 모두 단체 덕분이다.
우리의 일상은 옛날 동화처럼 ‘그래서 ~~~ 잘 살았다고 해요’라고 마무리되지 않는다. 삶은 계속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또 고비를 만나게 된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었다고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만나는 고비는 상처도 남기지만 경험치도 남긴다. 그러니 지나온 고비마다 배우고 느낀 것으로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구나 다음 세대를 위해 교육의 변화를 꿈꾸고 노력하는 좋은 어른들이 있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있으니, 걱정할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