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른이었을 때, 큰 아이는 만 3살, 둘째가 14개월이었다. 육아의 지옥에서 탈출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너무나 막막하고 고단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잘 안 먹고 잘 안 자고 잔병치레가 많았던 큰아이, 고집쟁이에 짜증 만땅이었던 둘째 아이. 다른 엄마들은 아이들 크는 게 너무 아깝다고 했지만 난 제발 빨리 커서 나를 좀 자유롭게 해 달라고, 자는 아이들 머리맡에서 간절히 빌기도 했었다. 다행이 아이들이 커 가면서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잘 적응했고 먹는 거, 자는 것도 좋아졌다.
한국 엄마들이 모이면_중국에서
큰 아이 5학년, 작은 아이 2학년 때 남편의 일 때문에 중국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사업이 계속 어려워져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때라 중국에서도 학비를 감당할 만한 로컬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게 되었다. 그 당시 주변에는 주재원 가족들이 대부분이어서 또래 아이들이 국제 학교를 많이 다니고 있었는데 국제 학교에 비해 중국 학교는 많이 열악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의 상황 때문에 낯설고 쉽지 않은 환경을 만나게 된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했다. 그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아이들이 자기도 뭔지 모르는 힘든 마음들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 이외에는 물리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성인이 돼서 아이들이 말하길, 그 당시는 그게 힘든 건지 뭔지 몰랐다고 한다. 지금 다시 돌아가라면 '노땡큐'라고^^
해외에 사는 한국 부모들의 사교육 열풍은 더 뜨겁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 돌아가야 하니 한국 공부도 뒤지지 않게 해야 하고, 국제 학교 다니니 그 기간에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올려야 하며, 중국에 사니 중국어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중국에서도 한국 엄마들이 모이면 과외 선생님과 학원 정보에 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변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부모가 없었다.
대학 대신 갭이어(Gap year)_캐나다에서
그러던 중 우연히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등대지기학교 홍보 영상을 보게 되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마음으로 온라인으로 4기에 참여했고 한국 방문 시기와 맞아서 졸업 여행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등대지기 졸업 후 이상하게 하나도 불안하지 않았다. 내가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어서 더 힘이 났다. 그 힘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지역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비영리단체의 모금 영역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후원 업무를 맡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상근자로 일할 수도 있었지만 다시 캐나다로 이민하게 되었다. 생존을 위한 이민이었다. 운 좋게 기술 이민 자격이 되었다. 이민이 아니었다면 아이들 고등학교도 못 보낼 정도로 어려웠다.
당시 고등학생과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은 4년 동안의 중국 경험 때문인지 캐나다에서 적응하는 걸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제법 성장한 나는 아이들에게 대학에 바로 안 가도 된다, 놀기도 하고, 일도 해 보라고 적극 추천할 수 있었고 작은 아이는 대학에 가기 전 갭이어(Gap year, 학업을 쉬는 기간)를 하게 되었다. 당시 캐나다 아이들도 갭이어를 하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정말 나는 아이들 대학 입학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가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처럼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캐나다여서 그랬을까? 아니다. 한국에 있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작은 아이 슬기는 그 후로도 주변 친구들에게 갭이어를 적극 추천하고 있고, 갭이어 기간 동안 했던 여러 가지 경험들은 캐나다 대학 졸업 후, 직업을 선택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슬기는 갭이어 기간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자원봉사도 했었다.
오늘,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가끔 아이들에게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아니었으면 엄마가 너희들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 모른다고 말하곤 한다. 불안 때문에 내 욕망을 아이들 통해 실현시키려 했었을 것이고,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 믿으며 서로 잡고 있었던 끈들이 썩어 들어가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시스템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지, 함께 옳지 않은 일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마흔이 넘어서 너무 멋지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지금도 만나면 바로 잠금 해제 되어 버리는 사람들. 아이들도 다 컸지만 서로 잘 늙어갈 것을 격려하며 서로에게 늘 힘이 된다. 아이들이 어리든, 이미 어른이 되었든 부모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게 가장 큰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내 내면을 계속 살피고 나를 알아가며, 비뚤어진 욕망을 알아채고 가던 길을 돌아오며, 아이들과 함께 계속 성장해 나가는 것, 이것이 삶 전체를 통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엄마는 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줘요!"
갱년기 대비를 위해 40대 중반에 시작한 마라톤. 얼마 전 큰 아이가 첫 하프 마라톤을 뛰고 엄마 때문에 하게 되었다며 ‘You are my biggest inspiration.’(엄마는 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줘요.)이란 말을 해 줬을 때, 다시 깨달았다. 그냥 내가 좋은 거 열심히 기쁘게 하면서 살면 그게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이구나.
“엄마, 우리가 공부 못해서 꼴찌하고 그래도 그렇게 힘이 났을까?”
아이들이 언젠가 물었다.
“그랬을걸? 꼴찌도 행복한 세상 만드는 일 하느라 바빴을 듯.”
그렇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아이들 교육을 떠나서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내 인생에 값없이 선물처럼 주어진 만남이어서 늘 빚진 마음이 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자세한 활동이나 주요 현안들에 예전만큼 민감하지 못 하지만, 늘 응원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그 사명을 다해 세상에서 없어지는 그날까지만 후원하는 것으로!
제발 좀 빨리 커다오.
내년이면 큰 아이가 서른 살이 된다.
내가 서른이었을 때, 큰 아이는 만 3살, 둘째가 14개월이었다. 육아의 지옥에서 탈출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너무나 막막하고 고단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잘 안 먹고 잘 안 자고 잔병치레가 많았던 큰아이, 고집쟁이에 짜증 만땅이었던 둘째 아이. 다른 엄마들은 아이들 크는 게 너무 아깝다고 했지만 난 제발 빨리 커서 나를 좀 자유롭게 해 달라고, 자는 아이들 머리맡에서 간절히 빌기도 했었다. 다행이 아이들이 커 가면서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잘 적응했고 먹는 거, 자는 것도 좋아졌다.
한국 엄마들이 모이면_중국에서
큰 아이 5학년, 작은 아이 2학년 때 남편의 일 때문에 중국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사업이 계속 어려워져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때라 중국에서도 학비를 감당할 만한 로컬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게 되었다. 그 당시 주변에는 주재원 가족들이 대부분이어서 또래 아이들이 국제 학교를 많이 다니고 있었는데 국제 학교에 비해 중국 학교는 많이 열악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의 상황 때문에 낯설고 쉽지 않은 환경을 만나게 된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했다. 그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아이들이 자기도 뭔지 모르는 힘든 마음들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 이외에는 물리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성인이 돼서 아이들이 말하길, 그 당시는 그게 힘든 건지 뭔지 몰랐다고 한다. 지금 다시 돌아가라면 '노땡큐'라고^^
해외에 사는 한국 부모들의 사교육 열풍은 더 뜨겁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 돌아가야 하니 한국 공부도 뒤지지 않게 해야 하고, 국제 학교 다니니 그 기간에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올려야 하며, 중국에 사니 중국어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중국에서도 한국 엄마들이 모이면 과외 선생님과 학원 정보에 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변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부모가 없었다.
대학 대신 갭이어(Gap year)_캐나다에서
그러던 중 우연히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등대지기학교 홍보 영상을 보게 되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마음으로 온라인으로 4기에 참여했고 한국 방문 시기와 맞아서 졸업 여행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등대지기 졸업 후 이상하게 하나도 불안하지 않았다. 내가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어서 더 힘이 났다. 그 힘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지역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비영리단체의 모금 영역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후원 업무를 맡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상근자로 일할 수도 있었지만 다시 캐나다로 이민하게 되었다. 생존을 위한 이민이었다. 운 좋게 기술 이민 자격이 되었다. 이민이 아니었다면 아이들 고등학교도 못 보낼 정도로 어려웠다.
당시 고등학생과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은 4년 동안의 중국 경험 때문인지 캐나다에서 적응하는 걸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제법 성장한 나는 아이들에게 대학에 바로 안 가도 된다, 놀기도 하고, 일도 해 보라고 적극 추천할 수 있었고 작은 아이는 대학에 가기 전 갭이어(Gap year, 학업을 쉬는 기간)를 하게 되었다. 당시 캐나다 아이들도 갭이어를 하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정말 나는 아이들 대학 입학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가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처럼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캐나다여서 그랬을까? 아니다. 한국에 있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작은 아이 슬기는 그 후로도 주변 친구들에게 갭이어를 적극 추천하고 있고, 갭이어 기간 동안 했던 여러 가지 경험들은 캐나다 대학 졸업 후, 직업을 선택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슬기는 갭이어 기간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자원봉사도 했었다.
오늘,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가끔 아이들에게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아니었으면 엄마가 너희들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 모른다고 말하곤 한다. 불안 때문에 내 욕망을 아이들 통해 실현시키려 했었을 것이고, 아이들을 위한 길이라 믿으며 서로 잡고 있었던 끈들이 썩어 들어가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시스템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지, 함께 옳지 않은 일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마흔이 넘어서 너무 멋지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지금도 만나면 바로 잠금 해제 되어 버리는 사람들. 아이들도 다 컸지만 서로 잘 늙어갈 것을 격려하며 서로에게 늘 힘이 된다. 아이들이 어리든, 이미 어른이 되었든 부모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게 가장 큰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내 내면을 계속 살피고 나를 알아가며, 비뚤어진 욕망을 알아채고 가던 길을 돌아오며, 아이들과 함께 계속 성장해 나가는 것, 이것이 삶 전체를 통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엄마는 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줘요!"
갱년기 대비를 위해 40대 중반에 시작한 마라톤. 얼마 전 큰 아이가 첫 하프 마라톤을 뛰고 엄마 때문에 하게 되었다며 ‘You are my biggest inspiration.’(엄마는 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줘요.)이란 말을 해 줬을 때, 다시 깨달았다. 그냥 내가 좋은 거 열심히 기쁘게 하면서 살면 그게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이구나.
“엄마, 우리가 공부 못해서 꼴찌하고 그래도 그렇게 힘이 났을까?”
아이들이 언젠가 물었다.
“그랬을걸? 꼴찌도 행복한 세상 만드는 일 하느라 바빴을 듯.”
그렇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아이들 교육을 떠나서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내 인생에 값없이 선물처럼 주어진 만남이어서 늘 빚진 마음이 있다.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자세한 활동이나 주요 현안들에 예전만큼 민감하지 못 하지만, 늘 응원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그 사명을 다해 세상에서 없어지는 그날까지만 후원하는 것으로!
😊 박종미 선생님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다면 <인터뷰> 도달하고 싶은 미래를 사는 사람